반규약문으로서 반논리문 (Kocurek and Jerzak 2021)
Alexander W. Kocurek and Ethan J. Jerzak, "Counterlogicals as Counterconventionals" Journal of Philosophical Logic 50: pp. 673-704, 2021.
소개
반사실문(counterfactuals) 내지 가정법 조건문(subjunctive conditionals)이란 현실에서 성립하지 않는 내지 가정된 상황을 전건으로 갖는 조건문을 의미한다. 그런데 반사실문에 대한 (스톨네이커와 루이스의) 표준적 의미론에 따르면 불가능한 사태가 가정된 반사실문은 사소하게 참이다. 논리적 가능성이 가장 넓은 의미에서의 가능성이라는 점에 동의한다면, 논리적 거짓이 전건에 온 조건문은 후건이 어떻게 되든 참이며, 나아가 우리는 그러한 조건문에 대한 적합한 믿음 태도를 가질 수도 없다고 해야 할 것이다.
이에 관한 기존의 논쟁은 크게 두 편으로 갈라져 있었다. 한편으로, 루이스를 따라, 전건이 불가능한 사태를 표현한다면 그러한 조건문에 대해 우리가 평가할 수 있는 것은 없으며, 따라서 그러한 문장은 사소한 진리값을 갖는다는 입장이 있다. 다른 한편으로, 최근의 흐름으로는, 불가능세계(impossible worlds)를 도입하는 등의 방식을 통해 반가능문에 대한 사소하지 않은 진리값 할당을 가능하게 해야 한다는 입장이 있다. 전자는 반가능문에 대한 우리의 직관에, 후자는 존재론적 검약성에 각각 상충되는 듯 보인다는 점에서 이에 관한 논쟁은 첨예하다.
이 논문에서 저자들은 중도를 모색한다. 일단 이 논문은 논리적 거짓이 전건에 오는, 즉 '반논리문'(counterlogicals)에 대한 중도적 이론의 모색을 목표한다. 이들의 전략은, 반논리문을 반규약문(counterconventionals), 즉 문장에서 사용되는 표현에 관한 규약이 다른 상황이 가정된 그러한 문장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여기까지 볼 때, 이들이 논리학에 대한 일종의 표현주의(expressivism)를 견지하리라는 것은 예측할 수 있는 점이며, 실제로 이들은 논문 말미에서 표현주의적 입장을 내세운다.
나아가 이들은 자신의 이론이 단지 반논리문들뿐 아니라 모든 반가능문에 대해 적용될 수 있을 것을 기대한다. 이는 논문 부록에서 증명되는(요약에서는 생략), 불가능세계 의미론과 표현주의적 의미론 간의 등가성에 바탕한 기대이다. 이들의 증명 및 주장들이 받아들일 만한 것이라면, 반논리문뿐 아니라 반가능문 일반에 관한 보다 온건하면서도 설명력 있는 이론이 마련될 수 있을 것이다.
저자들의 이름을 어떻게 읽어야 할지가 일견 난해한데, 두 이름 모두 폴란드계 성씨임을 고려할 때, "알렉산더 코추렉", "이선 이어작"으로 읽는 것이 맞아 보인다. 이들이 미국 네이티브인지라, 개인적으로 '미국식 발음'을 따를지도 모르는 것이기는 하지만...😅 (본인한테 직접 물어보면 좋겠지만, 굳이 만날 일도 없는 사람에게...)
요약
개요. 이 논문에서 저자들은 공허하지 않은 반논리문에 대한 새로운 해석, 즉 이를 반규약문으로 간주하는 해석을 제안한다. 반규약문에 대한 체계화는 그들의 이전 논문, "AGAINST CONVENTIONAL WISDOM"(Kocurek, Jerzak and Rudolph 2020)에서 제안되었으며, 저자들은 여기에서 제안된 반규약 논리를 통해 반논리문의 의미를 해명하고자 한다. 이를 통해, 저자들은 기존의 불가능세계 의미론이 갖고 있던 여러 문제들이 해결될 것을 기대한다.
1. 어려운 문제
다음은 전건이 논리적으로 불가능한 조건문, 즉 반논리문(counterlogicals)의 예시들이다:
- (1') 만일 전건 긍정의 미성립이 후건 부정의 미성립을 함축했더라면, 또한 전건 긍정이 성립하지 않았더라면, 후건 부정 또한 성립하지 않았을 것이다.
(2) 만일 프랑스가 군주제이면서도 또한 군주제이지 않았더라면, 혁명가들은 퍽 당황스러웠을 것이다.
(3) 만일 거짓말쟁이 문장이 참이면서 또한 참이지 않았더라면, 달은 녹색 치즈로 만들어져 있었을 것이다.
(4) 만일 아리스토텔레스가 자기동일성을 갖지 않았더라면, Metaphysics Γ에서의 무모순율에 대한 그의 논증은 성립하지 않았을 것이다.
한편으로 이 문장들은 사소하지 않는 진리 조건을 갖는 듯 보인다. 어떤 것은 참이고, 어떤 것은 거짓이며, 어떤 것은 답을 내리기 어렵다. 다른 한편으로, 사소화 폭발(trivializing explosion)에로 이끌어지지 않으면서도 논리적으로 불가능한 반사실적 가정 하에서 어떻게 추론할 수 있는지는 명확하지 못하다.
2. 불가능세계 의미론
다음은 전건이 불가능한 조건문, 즉 반가능문(counterpossibles) 중 반논리문이 아닌 것의 예시들이다:
- (5) 만일 물이 과산화수소였더라면, 생명체들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6) 만일 철수가 연어였더라면, 그는 날개를 가졌을 것이다.
(7) 만일 소크라테스만 존재하고 {소크라테스}는 그렇지 않았었더라면, 그는 슬퍼했을 것이다.
반논리문은 반가능문의 하위종으로 간주되곤 한다. 반가능문에 대해서는 두 관점이 대립하고 있다. 전통적 입장인 공허주의(vacuism)에 따르면, 모든 반가능문은 공허한 진리 조건을 갖는다. 즉: (V) ¬◇φ ⊨ φ □→ ψ. 반면 부상하는 입장인 비공허주의(non-vacuism)에 따르면, 공허하지 않은 진리 조건을 갖는다. 가령 (5)는 참, (6)은 거짓이며, (7)은 소크라테스의 심적 사실에 따라 참 또는 거짓인 문장으로 보인다.
비공허주의를 위해서는 스톨네이커-루이스 의미론에 대한 확장이 필요하다. [〈W, f, V〉로 정의되는 표준적 모델과 달리] 불가능세계 모델 ℐ는 〈W, P, f, V〉의 형태를 갖는다. P ⊆ W는 가능세계들의 집합이며, 불가능세계들의 집합 I는 W ∖ P로 정의된다. 함수 f: 𝒫(W) × W → 𝒫(W)는 선택 함수이며, 평가 함수 V는 원자 문장과 가능세계 w ∈ P를 받아 진리치({0, 1})를 산출한다. 이제 언어 ℒ의 문장들에 관한 만족 관계 ℐ, w ⊩i φ("⟦φ⟧ℐ")는 다음과 같이 정의된다[양상 연산자를 포함하지 않은 문장 형식 생략]:
- ℐ, w ⊩i □φ iff 모든 v ∈ P에 대해, ℐ, v ⊩i φ;
ℐ, w ⊩i ◇φ iff 어떤 v ∈ P에 대해, ℐ, v ⊩i φ;
ℐ, w ⊩i φ □→ ψ iff 모든 v ∈ f(⟦φ⟧ℐ, w)에 대해, ℐ, v ⊩i ψ.
이에 더해, 비공허주의자들은 f에 대한 다음의 추가적 제약을 포함하곤 한다: (S) f(X, w) ⊆ X; (WC) w ∈ X라면, w ∈ f(X, w); (SI) X ⋂ P ≠ ∅라면, f(X, w) ⊆ P. 이 세 제약은 각각 다음의 원리와 대응된다: (I) ⊨ φ □→ φ; (MP) φ □→ ψ, φ ⊨ ψ; (NC) ◇φ, □ψ ⊨ φ □→ ψ.한편 불가능세계 의미론 하에서, 공허주의자들의 논제는 다음의 강한 제약을 부과하는 것에 상응한다: (NCI) X ⋂ P = ∅라면, f(X, w) = ∅.
이제 비공허주의자들의 입장이 옳다고 간주해 보자. 그러나 비공허주의를 받아들일 경우에도 반논리문에 대한 공허주의/비공허주의는 대립한다. 전자에 따르면, 불가능세계 의미론 하에서도 반논리문은 사소한 진리 조건을 가진다. 즉: (CV) ⊨ ¬φ라면, ⊨ φ □→ ψ.
3. 주제 바꾸기
그러나 반논리문을 의미론적으로 공허하다고 보아야 할 이유가 있다. 다음 예문:
- (8) 만일 직관주의 논리가 올바른 논리였더라면, 연속체 가설은 참이었거나 또는 참이지 않았을 것이다.
에 대해 비공허주의자는 (8)이 거짓이라고 할 것이다. 직관주의는 배중률을 거부하니 말이다.
그러나 혹자는 이것이 사용-언급의 오류를 범하고 있다고 할 수도 있다. 크립키의 지적에서처럼, 반사실적 각본을 평가함에 있어 기술에 사용되는 것은 우리의 언어이다. 즉 다음 예문:
- (9)
a. 만일 사람들이 "샛별"과 "개밥바라기"를 서로 다른 대상을 지시하기 위해 사용했었더라면, 문장 "샛별은 개밥바라기이다"는 참이었을 것이다.
b. 만일 사람들이 "샛별"과 "개밥바라기"를 서로 다른 대상을 지시하기 위해 사용했었더라면, 샛별은 개밥바라기였을 것이다.
에서 (9a)는 참이지만 (9b)는 거짓이다.
같은 이유에서, (8)의 후건에 있는 "또는", "않다"는 언급된 것이 아닌 사용된 것이다. 물론 직관주의 논리에 따라 돌아가는 세계에서 사람들은 "또는", "않다"를 배중률을 거부하는 방식으로 사용할 것이다. 즉, 다음 예문:
- (10) 만일 직관주의 논리가 올바른 논리였더라면, 문장 "연속체 가설은 참이거나 또는 참이지 않다"는 참이었을 것이다.
은 거짓이다. 그러나 (10)이 거짓이라는 것은 무관한 문제이다. 우리가 "또는", "않다"의 의미를 바꾸지 않는 한 (8)은 참인 것이다.
외견상 공허하지 않은 어떠한 반논리문에 대해서도 같은 것을 적용할 수 있다. (3)의 경우 외견상 거짓이었지만, 거기에서 "또한", "않다"는 언급된 것이 아니라 사용된 것이기에 이는 고전적인 방식으로 해석되어야 하며, 따라서 (3)의 전건은 고전적으로 해석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해당 전건은 비정합적인 것이 된다. 그렇다면 "또한"과 "않다"는 고전적 의미를 갖지 않음에 따라 논리적으로 불가능한 것이 아니었거나, 논리적으로 불가능함으로부터 공허하게 참인 것이 된다.
한편, (3)과 달리 다음 예문:
- (11) 만일 거짓말쟁이 문장이 부정과 연언에 대한 고전적 해석에 따라 동시에 참이면서 참이 아니었더라면, 달은 녹색 치즈로 만들어져 있었을 것이다.
을 부정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연언에 대한 고전적 의미는, 어떤 문장과 그 부정의 연언으로부터 모든 것이 따라나온다는 것을 포함하기 때문이다. (11)을 부정하는 것은 단지 고전 논리를 부정하는 것이거나, 고전 논리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비고전적 논리에 대해 콰인W. V. O. Quine이 제기한 "주제 바꾸기" 반론을 상기시킨다. 콰인이 견지하기로 비고전적 논리학자들이 고전 논리의 어떤 법칙을 부정할 때마다, 그들은 고전 논리학자들이 말하던 것에 관해서가 아니라 그저 다른 논리적 연산에 관해 말하는 셈이 되고 만다.
이를 보이기 위해 콰인이 생각해 보라고 하는 것은 영어 같은 언어를 말하지만 "그리고"와 "또는"의 사용이 비표준적인 가상의 도시("일탈군"이라고 부르자)이다. 일탈군 주민들에 따르면, 연언문으로부터 연언지를 도출할 수는 없지만, 각 연언지로부터 연언문이 도출된다. 반대로, 선언문으로부터 선언지를 도출할 수는 있지만, 선언지로부터 선언문을 도출할 수는 없다.
콰인은 비고전 논리학자들이 꼭 이와 같은 일을 한다고 견지한다. 직관주의자들이 "아니다"나 "또는"이라는 낱말을 고전 논리학자들처럼 쓰기는 하지만, 이는 고전 논리학자들이 이를 통해 의미하는 바와는 전혀 다른 것을 의미한다. "아니다"와 "또는"은 배중률을 그 의미의 일부로 포함할 뿐이다. 마찬가지가 반논리적 비공허주의자들에 대해 이야기될 수 있다. 이들은 단지 주제를 바꾸고 있다고 말이다. 반논리문이 공허하지 않은 양 보일 때, 화자는 암묵적으로 전건으로부터 시사된 논리에 순응하게끔 논리학적 어휘들을 재해석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하에서는 비록 두 논리학자가 "아니다"와 "또는"을 사용할 때 서로 다른 것을 의미한다는 데에 동의하더라도, 이로부터 직관주의자가 '주제를 바꾼다'거나 반논리문이 공허함이 따라나오지는 않는다는 점이 제안될 것이다.
4. 반규약문
반규약문이란 어떻게 낱말과 어구를 사용할 것인가에 관한 메타언어적 협상(metalinguistic negotiations) 과정에서 등장한다. 여기에서 메타언어적 협상이란, 사물들이 어떠한가가 아니라, 무엇을 무엇으로 간주할 것인가에 관한 논쟁을 말한다. 가령, 다음의 대화를 보라:
- (13)
가영: 명왕성은 행성이야.
나영: 아니야, 명왕성은 궤도 인근의 천체를 일소하지 않기 때문에 행성이 아니야.
가영: 나는 IAU(국제천문연맹)의 정의를 받아들이지 않아! 명왕성은 행성이고, IAU가 뭐라 하든 나는 신경 안 써.
나영: 봐봐, 네가 명왕성을 행성이라고 생각한단 건 알겠는데, IAU가 거기에 동의하지 않는 데에는 좋은 이유가 있어. 만일 명왕성이 행성이었더라면, 케레스나 에리스, 하우메아, 마케마케 같은 다른 여러 천체들도 행성이었을 거라구.
여기에서 가영과 나영은 명왕성의 궤도가 어떻게 생겼는지나, 그 궤도가 해왕성의 것과 교차하는지 등에 관해 불일치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이들의 불일치는 명왕성을 어떻게 분류하겠느냐에 관한 것이다. 따라서 (13)은 메타언어적 협상이다.
한편 나영의 마지막 응답은 반사실문의 형태를 취한다: (14) 만일 명왕성이 행성이었더라면, 케레스나 에리스, 하우메아, 마케마케 같은 다른 여러 천체들도 행성이었을 것이다. (14)는 두 방식으로 읽을 수 있다. 하나의 독법은, 만일 명왕성이 궤도 인근의 천체를 일소했더라면, 케레스나 에리스 등도 그러했을 것이다, 와 같은 것이다. 이 경우 (14)는 명백히 거직이다. 그러나 직관적으로 볼 때 이는 나영이 말하려던 바가 아니다. 오히려 그가 말하려던 것은, 만일 명왕성이 행성으로 분류되었더라면, 케레스나 에리스 등도 그러했으리라는 것이다. 아인호이저(Einheuser 2006)를 따라, 전자를 반실체적(countersubstratum) 독법, 후자를 반규약적 독법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전자에서 고정되는 것은 언어 해석에 사용되는 규약이며, 실재가 변화한다면, 후자에서는 그 반대이다.
다음은 이 차이를 묘사하는 다른 예문들로, 각각은 반규약적 독법 하에서 참인 반면 반실체적 독법에서는 거짓이다:
- (15)
a. 만약에 세크러테어리엇이 운동선수였으면, 세상에서 제일 빠른 선수는 전부 말이었을 테지.
b. 만약에 피자가 채소였으면, 우리 애들도 더할 나위 없이 건강했을 텐데 말이야.
c. 만약에 《게임 오브 쓰론즈》가 코미디였으면, 이건 거의 다크 코미디였을 거야.
반규약문은 아인호이저가 c-괴물어(즉, 규약 전환 표현[cf. Kaplan, "Demonstratives"])라고 부른 것에 해당한다. c-괴물어의 다른 사례는 시제, 태도 동사, 의존성 동사를 포함한다. 명왕성에 관한 사례들로 쓰자면,
- (16) [요약자의 강조]
a. 명왕성은 행성이었지만, 지금은 아니다.
b. 가영은 명왕성이 행성이라고 생각한다.
c. 명왕성이 행성인지 아닌지는 IAU 회원들이 동의하는 정의가 무엇인지에 달려 있다.
또 규약 전환은 단지 반사실문뿐 아니라 안는 표현(embedding expressions)에서 광범위하게 나타는데, "...에 따르면"이나 "x의 의미에서"같은 표현은 오로지 규약을 전환할 뿐, 실체 전환적 독법을 결여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 (17) [요약자의 강조]
a. "행성"에 대한 가영의 정의에 따르면, 명왕성은 행성이다.
b. 가영의 의미에서 명왕성은 행성이다.
아이디어를 보다 구체화하기 위해 반규약문의 의미론을 다음과 같이 스케치해 보자. 핵심 생각은, 평가 지표에 전환 가능 매개변수인 규약을 도입하는 것으로, 이는 내포를 비논리적 표현에 할당하는 해석 함수이다. 반사실문이 c-괴물어가 되는 것은 이 규약 매개변수를 전환하는 때이다. 이제 각 원자 문장을 세계들의 집합에 사상하는 초규약(hyperconventional) 함수를 c: At → 𝒫(W)라고 하자. W에 관한 지표(index)란 w ∈ W인 w에 대해 〈w, c〉로, I를 모든 지표의 집합이라고 하자. 규약 모델이란 순서쌍 𝒞 = 〈W, f〉이며 여기에서 f: 𝒫(I) × I → 𝒫(I)는 선택함수이다. 이제 만족 관계 ⊩c는 세계가 아닌 지표 상대적 관계로 정의된다[조건문 외의 모든 경우 생략]:
- 𝒞, w, c ⊩c φ □→ ψ iff 모든 〈v, d〉 ∈ f(⟦φ⟧𝒞, w, c)에 대해, 𝒞, v, d ⊩c ψ.
또한 귀결 관계는 지표들에 관한 만족 관계의 보존으로 정의된다: Γ ⊨c φ iff if 𝒞, w, c ⊩c Γ, then 𝒞, w, c ⊩c φ.
표준적 의미론이나 불가능세계 의미론과 달리, 규약 의미론에서 원자 문장의 해석은 전환될 수 있다. 그러나 □, ◇에 대해서는 그럴 수 없다고 가정하자. 이 결과, 규약 의미론은 초내포적 의미론이 된다. 특히 공허주의는 성립하지 않는다. 즉, ¬◇φ ⊭c φ □→ ψ. 그러나 반논리적 공허주의는 성립한다. 즉, ⊨c ¬φ라면, ⟦φ⟧𝒞 = ∅이며, 따라서모든 규약에서 f(⟦φ⟧𝒞, w, c) = ∅이다. 이 경우 ⊨c φ □→ ψ이다.
또 반사실문이 세계와 초규약을 모두 전환하는 경우가 있을 수 있다. 가령,
- (18) 만일 명왕성이 행성이었더라면, 천문학자들은 그 모든 행성들을 주시하고 있어야 한다는 점에 어쩔 줄을 몰라했을 것이다.
은 참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는 반실체적 독법에서도, 반규약적 독법에서도 참이 아니다. 그렇다면 (18)이 참인 독법을 부여받기 위해, 반사실문은 세계와 초규약을 동시에 전환할 필요가 있다. 한편 어떠한 독법을 취해야 할지는 맥락의 영향을 받는다.
이러한 점들은 약간의 추가 사항들을 통해 대상 언어적 차원으로 들어올 수 있다. 세계에 관해 추가되는 것은 셋이다. (1) 특정한 세계에 대한 고정명이 되는, 상태 명목항(nominals)라는 새로운 원자식 s1, s2, s3, ...; (2) 명목항 s들에 대해 평가 세계를 s의 값으로 재설정하는 일항 연산자 @s("s에 따르면"); (3) 명목항 s들에 대해 s의 값을 평가 세계로 재설정하는 구속 연산자 ↓s.("s가 현재 세계를 의미한다고 하자"). 마찬가지 방식으로, 초규약의 측면에서도 이와 같은 추가 사항을 도입하자(이 경우, s 대신 초규약을 지명하는 원자식은 해석 명목항 i1, i2, i3, ... 이다.) 이어서 변항 할당 함수 g를 도입하자. g는 상태 명목항 s를 어떠한 세계에로 사상하며, 해석 명목항 i를 W에 관한 어떠한 초규약에로 사상한다.이제 만족 관계는 지표 및 변항 할당에 상대적이게 된다.
이제 새로 도입된('하이브리드 연산자'를 포함하는) 식들에 대한 만족 관계는 다음과 같이 정의된다(gxy =def. if k ≠ x, gxy(k) = g(k); else gxy(x) = y):
- 𝒞, w, c, g ⊩c s iff g(s) = w
𝒞, w, c, g ⊩c i iff g(i) = c
𝒞, w, c, g ⊩c @sφ iff 𝒞, g(s), c, g ⊩c φ
𝒞, w, c, g ⊩c @iφ iff 𝒞, w, g(i), g ⊩c φ
𝒞, w, c, g ⊩c ↓s.φ iff 𝒞, w, c, gsw ⊩c φ
𝒞, w, c, g ⊩c ↓i.φ iff 𝒞, w, c, gic ⊩c φ
하이브리드 연산자의 추가를 통해 얻을 수 있는 한 가지 이점은, 메타언어적 협상에 있어 공통지반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할 수 있게끔 해 준다는 것이다. 가영과 나영은 (19a)에 관해서는 불일치하지만, (19b)를 모두 받아들일 것이다.
- (19)
a. 명왕성은 행성이다.
b. 가영의 용어법에 따르면, 명왕성은 행성이다.
가영의 심적 상태를 단일한 초규약과 연관지을 수 있다고 가정하자면, @를 통해 (19b)를 분명히 만들 수 있다: a를 가영의 초규약이라고 하고 p를 (19a)라고 할 때, (19b)는 @ap이다. 한편 a → (p ↔ @ap)는 규약 논리의 정리이지만 p ↔ @ap는 그렇지 않은데, 이는 가영과 나영의 불일치가 a에 대해 일어나고 있음을 보여준다.
하이브리드 표현들은 또한 반실체적/반규약적 독법을 보다 분명히 해 준다. 반실체적 독법을 분명히 하기 위해, φ □→ ψ는 ↓i.((φ ∧ i) □→ ψ)로 대체될 수 있다(단, i에 φ나 ψ가 등장하지 않는 경우). 마찬가지로 순수한 반규약적 독법에서, φ □→ ψ는 ↓s.((φ ∧ s) □→ ψ)로 대체될 수 있다. 규약 의미론에 있어 반가능문은 오직 그 c-괴물어적 독법 하에서만 공허하지 않다. 반가능문에 대한 반실체적 독법은 모두 공허하다. 따라서 ¬◇φ ⊭c φ □→ ψ이면서도, ¬◇φ ⊨c ↓s.((φ ∧ s) □→ ψ)인 것이다[저자들은 여기에서 "s" 대신 "i"를 써 두었는데, 맥락상 "s"의 오기인 것으로 보인다].
5. 논리학적 표현주의
논리학적 논쟁에 대한 해석은 카르납R. Capnap, 에이어A. J. Ayer, 키셀Kouri Kissel 등에 의해 견지된 규약주의적 관점에 닿아 있다. 그 하나의 형태로, 다음의 입장을 논리학적 표현주의(logical expressionism)라고 부르자: 논리학적 주장은 화자의 논리학적 결의(commitment)에 대한 표현이지, '객관적으로 올바른' 논리에 관한 내지 명시된 집단이 채택하고 있는 사유 양식에 관한 사실적 주장이 아니다.
규약에 있어 올바르거나 틀린 그러한 것은 없다. 그러나, 어떤 규약이 특정 목적에 대해 더 낫거나 더 나쁠 수는 있다. 즉 규약이 취사선택될 수 있음은 규약들이 전부 동일선상에 있음을 함의하지는 않는다.
논리학이란 단지 특별한 부류의 규약일 뿐이다. 이는 "않다", "그리고", "또는", "맞다", "타당하다" 등의 낱말의 사용을 관장하는 규약이다. 원론적으로는, 어떠한 논리를 채택하는 것도 금지될 이유가 없기는 하다. 설령 그렇대도, 어떤 논리는 다른 것보다 나으며, 특정한 목적을 위해 어떤 논리가 더 나은지에 관한 합리적 불일치는 있을 수 있다.
역설에 관한 세미나에서 볼 법한 다음의 논쟁을 생각해 보자:
- (20)
조일: 거짓말쟁이 문장은 동시에 참이면서 거짓이야.
고준: 아니, 그렇지 않아. 거짓말쟁이 문장이 동시에 참이면서 동시에 참이 아닐 수는 없어. 어떤 문장도 그럴 수 없거든.
조일: 나는 무모순율을 받아들이지 않아. 거짓말쟁이 역설이 보여주는 건 어떤 모순들은 참이라는 거야.
고준: 봐봐, 나도 무모순율을 탓하기 쉽다는 건 알고 있지만, 그렇지 않아야 할 좋은 이유가 있어. 설령 거짓말쟁이 문장이 동시에 참이면서 참이 아니었더라도, 커리의 역설은 풀리지 않은 채 남아있을 거야.
논리학적 표현주의에 따를 때, (20)에서의 불일치는 순전히 사실적인 것이 아니다. 조일은 거짓말쟁이 문장이 영어 화자들이 말하는 경향에 따를 때 동시에 참이면서 거짓이라고 하는 것도, 어떤 언어 초월적인 의미에서 그렇다고 하는 것도 아니다. 대신 그는 특정한 논리적 규약을 채택하는 것에 관한 제안을 한다고 보여진다. 이를 위해 조일이 낱말이나 규약에 관해 무언가 명시적으로 언급할 필요는 없다.
실지로는, 그렇게 한다면 그 주장의 힘은 달라질 것이다. 조일이 (21a)를 주장할 때, 그가 따라서 (21b)를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 (21)
a. 거짓말쟁이 문장은 동시에 참이면서 거짓이다.
b. 나의 논리에 따르면, 거짓말쟁이 문장은 동시에 참이면서 거짓이다.
조일과 고준은 (21b)에 수긍하지만, (21a)에 대해서는 불일치한다. 대신 조일은 (21a)를 주장함에 따라 (21b)를 표현하고는 있다. p를 주장함에 따라 그가 p라고 믿음을 표현하는 것처럼 말이다. 이는 논리학적 불일치가 상이한 낱말 사용에 관한 것이라는 콰인의 주제 바꾸기에서의 정신을 반영한다. 그러나 이는 콰인이 생각한 것과 달리 참여자들이 단지 서로의 말을 흘려 듣는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대신, 이들의 불일치는 규범적인 것이며, 사소하지 않은 토론인 것이다.
이러한 이론적 이점에 더해, 논리학적 표현주의는 언어학적 데이터들로부터 지지되고 있다. 다음의 예문들을 보자:
- (22)
a. 나는 명왕성이 행성이라고 생각해.
b. 나는 명왕성이 1022kg보다 더 나간다고 생각해. (*) - (23)
a. 나는 거짓말쟁이 문장이 동시에 참이면서 참이 아니라고 생각해.
b. 나는 무모순율이 타당하다고 생각해. - (24)
a. 나는 거짓말쟁이 문장이 초일관 해석에 따를 때 동시에 참이면서 참이 아니라고 생각해. (*)
b. 나는 무모순율이 고전 논리학에서 타당하다고 생각해. (*)
동사 "...라고 생각하다"(consider)는 케네디와 윌러(Kennedy and Willer 2006)에 따르면 "반입장적 우유성"(counterstance-contingency)을 담지한다. ⌜α가 φ라고 생각한다⌝는 φ가 어떤 사실 외적 사항들에 있어 우유적인 때에만 맥락 속에서 정의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22a)는 (13)의 맥락에서 괜찮아 보이는 반면 (22b)는 그렇지 못하다.
(20)의 맥락에서, (23a)와 (23b)는 괜찮아 보인다. 이는 (20)의 맥락에서 논쟁거리는 약정에 의해 무마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는 논리에 관한 모든 주장의 진리가 규정만 하면 무마됨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24a)와 (24b)는 (20)의 맥락에서 말도 안 돼 보이는데, 이는 조일과 고준이 초일관 논리나 고전 논리가 무엇인지에 관해 불일치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또 이는 화자들이 논리학에 관해 전지적임을 의미하지도 않는다. 화자들은 어떤 규약에 개입(commit)하면서도 이를 깨닫고 있지 못할 수 있다. 이는 그들이 개입해 있는 규약이 세계 내적 사실에 의해 우유적인 경우 일어난다. 가령 IAU의 행성 정의를 정확히 알지는 못하더라도 이를 채택하고 있는 이가 (22a)를 말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끝으로, 논리학적 표현주의는 논리학에 관해 논쟁하는 논리학자들 스스로가, 그들이 낱말의 사용에 관해 논쟁하고 있다고 여겨야 함을 함의하지 않는다. 규범적 표현주의가 도덕적 불일치에서의 참여자들이 스스로를 비인지주의자라고 여겨야 함을 함의하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6. 반논리문을 위한 반규약 의미론
이제 반논리문을 위한 반규약 의미론인, (논리학적) 표현주의 의미론은 다음과 같이 제시된다. 먼저 세계들의 집합 W에 대해, W에 관한 초규약을 다음과 같은 함수 c로 재정의하자:
- 1. 각각의 p ∈ At에 대해, c(p) ⊆ W
2. 각각의 n항 ★ ∈ {¬, ∧, ∨, →, □, ◇}에 대해, c(★): 𝒫(W)n → 𝒫(W)
즉, 각 원자 문장을 세계에 할당하는 것에 더해 초규약은 (세계의 집합들에 대한 연산으로 모형화된) 논리 연결사의 내포를 논리 연결사에로 할당한다. 초규약이 임의의 X, Y ⊆ W에 대해 다음의 조건을 만족한다면, 이는 고전적이라고 일컬어진다:
- c(¬)(X) = Xc
c(∧)(X, Y) = X ⋂ Y
c(∨)(X, Y) = X ⋃ Y
c(→)(X, Y) = Xc ⋃ Y
c(□)(X) = {w ∈ W | X =W}
c(◇)(X) = {w ∈ W | X ≠ ∅}
지표는 그 초규약이 고전적일 때 고전적이다. CIW를 W에 관한 고전적 지표들이라고 하자. 표현주의 모델은 순서쌍 ℰ = 〈W, f〉으로, W ≠ ∅이며 f: 𝒫(IW) × IW → 𝒫(IW)이다. 만족 관계는 다음과 같이 정의된다:
- ℰ, w, c ⊩e p iff w ∈ c(p);
ℰ, w, c ⊩e ★(φ1, ... φn) iff w ∈ c(★)(⟦φ1⟧ℰ, c, ... ⟦φn⟧ℰ, c);
ℰ, w, c ⊩e φ □→ ψ iff 모든 〈v, d〉 ∈ f(⟦φ⟧ℰ, w, c)에 대해, ℰ, v, d ⊩e ψ.
귀결이란 고전적 지표들에 관한 만족 조건의 보존이다. 즉, Γ ⊨e φ iff 모든 표현주의 모델 ℰ와 모든 〈w, c〉 ∈ CIW에 대해, ℰ, w, c ⊩e Γ라면 ℰ, w, c ⊩e φ이다. 이는 ⊨e가 고전 논리에 종속됨을 보증한다. 귀결 개념이 주어지고 나면, IWS와 표현주의 의미론은 ℒ에 관한 같은 논리를 생성한다. 즉, ⊨i = ⊨e이다.
따라서 IWS가 할 수 있는 것은 표현주의 의미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둘은 반논리문을 서로 다른 방식으로 공허하지 않게 처리한다. IWS에서는 원한다면 어떤 문장에 대해서든 이를 만족하는 불가능세계를 모델 안으로 도입하는 폭력적 방식으로(by brute force) 이를 처리한다. 이 때 진리는 단지 규정만을 가지고 결정된다. 반면 표현주의 의미론은 보다 체계적인 방식으로 반논리문의 비공허성을 생성한다. 여기에서 진리는 조합적으로(compositionally) 결정된다. 결과적으로, 표현주의 의미론은 불가능세계를 '상이한 기술 하에서의 가능세계'로 대치하게 된다.
[이하 생략]
7. 반가능문
불가능세계는 여전히 필요한가? 어찌됐건 (5)-(7)과 같은, 반논리문이 아닌 반가능문을 다룰 필요는 있어 보인다. 반논리문과 같은 방식으로 다른 모든 반가능문을 다룰 수는 있을 것이다. 반가능문은 반규약적 독법에서는 공허하지 않고, 반실체적 독법에서만 공허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5)-(7)의 자연스러운 해석이 반규약적이라는 것은 전혀 분명하지 못하다. 가령 우리는 "철수가 연어로 세어졌더라면 ..." 따위를 가정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 예문들은 반실체적 독법에서도 공허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단지 불가능세계만을 사용해 반논리문을 다루면 되는 것 아니겠는가? 굳이 반논리문을 위한 별개의 처분이 있어야 하는가?
두 이유에서, 불가능세계만으로는 충분하지 못하다. 첫째로, 규약 전환을 설명하기 위한 반규약문에 대한 체계적 이론은 여전히 필요하다. 그렇다면 반논리문을 위한 표현주의적 의미론을 또한 사용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둘째로, 3절에서 보았듯 반논리문을 위해 IWS를 사용하는 데에 의문을 제기할 이유가 존재한다. 논리학은 다른 형이상학적 주장들에 비해 보다 규약과 긴밀한 관계를 갖고 있다.
그럼에도 불가능세계에 대한, 논리적 불가능성과 비논리적 불가능성에 대한 해명을 구분하지 않는, 보다 급진적 관점에는 공감할 만하다. 그러한 관점에서 불가능세계란 가능세계와 구분되는 존재자가 아니게 될 것이다. 불가능세계란 단지 상이한 기술 하에서의 가능세계들일 뿐이다. 실지로 이러한 해명은 본고의 독창적 해명이 아닌, 불가능성에 관한 다양한 저작들에서 옹호되어 온 해명 방식이기도 하다. [중략]
다시 돌아와 코헨의 어려운 문제 (1)에 대해 우리는 다음과 같이 답할 수 있다: 그때그때 다르다. 질문을 반실체적으로 읽자면, 정답은 "그렇다"이다. 그러나 반규약적으로 읽자면, 정답은 "아니다"이다. 독해에 있어 두 독법은 모두 열려 있다. 질문에 답하기 어려웠던 것은, 단지 그 질문이 애매했기 때문이었다.
시사점
- 이들의 관점은 이른바 '이차원적 의미론'(2D semantics)을 반영한다고 할 수 있겠다. 이차원적 의미론에 관한 종래의 여러 저작들은 '선험성'에 많은 비중을 둔 해명을 제공하곤 했는데, 이 논문은 형식적 모형화의 측면에 보다 집중된 해명을 제공한다는 의의가 있다. (단, 이들의 형식적 논구 자체는 2020년의 다른 논문에서 먼저 이루어졌다.)
- IWS에서의 귀결 개념과 표현주의 모델에서의 귀결 개념이 동치라는 것을 보이는 부록의 증명이 참고할 만하다. 또한, 나아가 이차원적 의미론과 불가능세계 의미론의 접합점에 관한 (야심찬) 언급을 곱씹을 수 있겠다고 생각한다.
- 굳이 초내포적 의미론을 취해야만 하느냐는 의구심은 남는다. 차라리 어떤 방식으로 불가능세계들을 (외연적이게끔) 재구성한 뒤, 그 세계들을 분할하거나, 어떤 규약으로부터 재구성된 세계들+가능세계들로 구성된 집합들에로 사상하는 함수를 도입하는 것이 보다 용이하지 않은가?
- 끝으로, 많은 반실재론적 저작들이 겪는 문제를 이들 또한 겪으리라는 생각도 든다. 이들이 선제하는 관점과 일관된 메타논리적 관점은 '메타논리적 표현주의'이겠는데, 그렇다면 이들의 논지와 같은 식으로, 이들의 논문 전체가 논리학적 논쟁에 관한 어떤 사실적인 설명을 준다기보다는 그 논쟁들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제안하는 그러한 것에 불과하다고 주장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렇다면 굳이 이들의 제안을 받아들일 필요가 있겠는가?
이 블로그에 이렇게 긴 요약문을 쓸 줄 몰랐는데, 정리하고 나니 엄청 길어지는 바람에 누구도 읽고 싶지 않아하는 요약이 되었다는 시사점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