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미에 의한 진리 - 1부 (1) (Russell 2008)
Russell, Gillian. 2008. "Part 1. The Positive View" in Truth in virtue of Meaning(pp. 29-128). Oxford: Oxford University Press.
글타래: 1부 (1) | 1부 (2) | 2부 | 3부
소개
질리언 러셀Gillian Russell(블로그)은 호주가톨릭대학교 다이아노이아 철학 대학Dianoia Institute of Philosophy, ACU 교수로 재직 중인 철학자이다. 프린스턴에서 박사를 받았고, 언어철학 및 논리철학 분야의 연구를 주로 수행하고 있다.
러셀의 2008년 저작, Truth in virtue of Meaning은 제목 그대로 의미에 의한 진리, 즉 "분석적 진리"의 문제를 다룬다. 콰인의 "두 도그마" 이후, 분석적 진리 개념의 이해 가능성에 관한 의심의 눈초리가 있어 왔다. 그러나 이후 이루어진 많은 철학적 발전, 특히 양상 혁명과 더불어 크립키S. Kripke, 카플란D. Kaplan, 퍼트남H. Putnam 등에 의해 이루어진 철학사적 진전은, 러셀에 따르면, 분석적 진리를 다시 담론장에 들일 근거를 제공하고 있다. (그 근거들에 관해서는, 이 책뿐 아니라 이와 비슷한 시기에 쓰인 그의 글, "Analyticity in External Languages"에서 언급하고 있다.)
책은 세 부(parts)로 나뉘어 있다. 서론에서 분석성 개념의 짧은 역사로 책을 열며, 1부, "The Positive View"에서 러셀은 분석적 진리의 개념을 정립하고, 이를 위한 이론적 바탕을 마련하고 있다. 단지 이론적 바탕을 마련하는 데에서 나아가, 부록에서는 그가 염두에 두는 체계를 형식화하고 있기도 하다. 이어 2부에서는 분석적 진리에 관한 (철학사적) 이의제기들을 조망한 뒤 이로부터 분석적 진리의 개념을 옹호하고, 3부에서는 분석적 정당화에 관해 제기될 수 있는 쟁점들을 소개하며 책을 닫는다.
1부에서 소개되는 그의 체계는 카플란의 예증사(demonstratives) 의미론에 많은 빚을 지고 있다. "이것", "지금", "여기" 따위의 예증사들에서 지시 결정자들이 발화를 항상 참이게 만든다는 사실로부터, 러셀은 다른 표현들에 있어서도 그 지시 결정자들 간의 관계를 통해 어떤 (복합) 표현의 분석성을 이해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즉, 분석성에 관한 전통적 이해이던 '의미에 의해 참'은 실지로 '지시 결정자에 의해 참'으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카플란의 의미론을 (내포와 사용 맥락으로 이루어진) 이차원적 의미론이라고 한다면, 러셀의 의미론은 여기에 '도입 맥락'을 추가한 삼차원적 의미론의 형태를 띄고 있다. 즉 그의 의미론은 카플란의 의미론에 대한 확장으로 이해될 수 있다. 이런 이유로, 카플란의 글 "Demonstratives" 및 여기에서 제공된 형식 체계에 대한 선지식은 러셀의 체계를 이해하는 데에 도움을 줄 수 있겠다.
러셀은 그의 체계를 통해 분석성에 관해 불분명하게 이해되고 있던 점들 및 (전통적 관점인) PWS+외연주의 의미론에서 역설을 낳던 사례들을 보다 직관에 부합하는, 명료한 형태로 만들 수 있을 것을 기대한다. 그의 체계가 받아들일 만한 것으로 밝혀진다면, 콰인 이후 양상성과 함께 배제된, 또한 크립키에 의해 ('선험적 우연'이라는 불완전한 형태로) 수면 위에 올라온 '의미에 의해 참' 개념을 보다 명료하게 다룰 기반을 얻게 될 것이다.
요약
1. "에 의하여"라는 관계
두 요소 논변[1.1]. "Carnap and Logical Truth"에서 콰인W. V. O. Quine의 요지: 문장의 진리값을 결정하는 요인으로 세계, 언어가 동시에 있지만, 이로부터 어떤 문장의 진리값은 둘 중 하나에 의해 더 크게 결정된다는 것이 따라나오지는 않는다. 콰인의 또다른 문제제기: 단지 그러한 결론이 따라나오지 않을뿐 아니라, 이는 그 자체로 거짓인데, 의미에 의한 참에 관한 사례들은 사실은 의미에 의한 참의 사례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보고시안P. Boghossian 역시 비슷한 이유로 의미에 의한 진리를, 형이상학적 개념에 한하여 거부한다. 보고시안이 주장하기로, 어떠한 진술 S에 대해서도 다음은 뻔한 소리이다:
예문 | |
---|---|
(1.1) | S가 참이다 iff 어떤 p에 대해, S가 p임을 의미하며 또한 p이다. |
그렇다면 어떻게 S가 p임을 의미한다는 사실이 S를 참이게끔 한단 말인가? 그가 지적하는 것은, 어떤 뜻에서 문장은 의미에 의해 참이지만, 이는 모든 문장이 의미에 의해 참이게 하는 그러한 뜻이라는 점이다. 그에 따르면 문장이 의미에 의해 참일 사소하지 않은 유일한 방식은 그 문장의 의미가 p임이 성립하게 만드는 경우이다. 그리고 그는 이러한 생각을 조롱한다.
소버E. Sober 또한 이러한 생각의 반직관성을 극적으로 묘사한다. 그는 프랑스의 총각들이, 영어 문장 "모든 총각은 결혼하지 않았다"의 의미가 모든 총각들이 결혼하지 않았게끔 만들고 있다고 그들이 깨달았을 때 발생할 공분을 이야기한다. 그렇다면 다음과 같은 딜레마가 반론으로 주어질 수 있다: 문장의 진리가 전적으로 의미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면, 이 때 이야기되는 것은 사소하다; 대신에 문장의 의미가 그 진리치에 대해 전적으로 책임이 있다면, 이는 부조리한 이야기가 된다.
"에 의하여"의 애매성을 해소하기[1.2]. 그러나 제3의 결정 관계를 생각함 직하다. 이를 위해, 먼저 다음 문장 "내가 여기 있다"를 생각해 보라. 직관적으로, 이 문장은 "눈은 하얗다"와 달리 그 의미로부터 그 진리가 보증된다. 이는 "내가 여기 있다"의 의미가 내가 여기 있게끔 하지 않음에도 그렇다.
또 자연수에 대한 이항곱 함수를 생각해 보라: x × y = z. 우리가 두 수, 가령 3과 5를 곱한다고 하자. 이 함수의 값은 당연히 15이다. 그런데 왜 그러한가? 첫째 논항은 3, 둘째 논항이 5이기 때문이다. 한편 이의 특별한 경우로, x-항이 0 이라고 하자. 그렇다면 y-항이 무엇이든 값은 0이 될 것이다. 즉 첫째 논항은 결과값을 결정하기에 충분하다. 이 간단한 예시는, 세계와 의미가 진리치를 결정하는 경우에 대한 유비이다.
어떤 함수에 대해 하나의 논항이 값을 결정하지만, 다른 것과의 연접을 통해서만 결정한다고 하자. 즉, (곱셈이라 하면,) x- 및 y-논항이 연접적으로 곱셈 함수의 값을 결정한다. 함수를 n-순서쌍의 집합으로 생각할 때, 이항 함수란 세번째 성원이 앞의 두 성원의 값인 그러한 모든 세 순서쌍의 집합이다. 또한 의미와 세계로부터 진리치로의 함수는 의미, 세계, 진리치의 세 순서쌍 〈m, w, v〉로 대표될 수 있을 것이다. 이를 M-함수라고 부르자.
함수에 대해, 다음과 같은 네 가지 뜻에서의 결정을 정의할 수 있겠다:
(정의 1) 부분적 결정 |
---|
함수 F에 대해 논항의 자리 i가 부분적으로 결론부 n+1를 정의하는 것은, n+1 순서쌍 〈x1, …, xi, … xn, y〉, 〈x1', …, xi', … xn', y'〉 ∈ F에 있어 x1 = x1', …, xi ≠ xi', …, xn = xn'이면서 y ≠ y'인 바로 그 때이다. |
(정의 2) 연접적 결정 |
---|
논항 자리의 부분열 〈i, …, k〉가 연접적으로 함수 F의 값을 결정하는 것은, 어떠한 n 순서쌍의 쌍 〈x1, …, xi, … xn, y〉, 〈x1', …, xi', … xn', y'〉에 대해서도 〈xi, … xk〉 = 〈xi', … xk'〉이지만 y ≠ y'인 바로 그 때이다. |
(정의 3) 전적 결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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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수 F에 대해 논항부 i, …, k의 논항 〈xi, … xk〉가 전적으로 결과값 y를 결정하는 것은, F의 모든 n+1 순서쌍에 대해, 만약 i, …, k 자리의 값이 xi, … xk라면, 그 n+1 순서쌍의 마지막 성원이 y인 바로 그 때이다. |
(정의 4) 잉여적 결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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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수 F에 대해 n+1 순서쌍 의 논항 xi가 잉여적으로 결과값 y를 결정하는 것은, (i) 논항의 자리 i가 부분적으로 F의 결과 자리를 결정하지만, (ii) 어떠한 n+1 순서쌍 〈x1', …, xi', … xn', y'〉 ∈ F도 x1 = x1', …, xi ≠ xi', …, xn = xn'이면서 y ≠ y'이지 않을(즉, 이 특정한 [순서쌍에 있어 1, ..., n 자리 논항의] 변경이 결과를 바꾸지 못할) 바로 그 때이다. [끝 부분에서 일어난 러셀의 다소간 혼란한 표기를 바로잡는다.] |
이제 분석성의 지지자들은 콰인과 보고시안에 대해 다음과 같이 답할 수 있다: 분석 문장의 진리는, 문장의 의미로부터 전적으로 결정된다고.
필연성에로의 붕괴?[1.3]. 그런데 〈에 의하여〉에 대한 이러한 해석에 있어, 분석 문장이란 필연적 진리를 표현하는 그러한 문장뿐이라고 생각할 만하다. 문장의 의미란 명제라고 한다면, 필연적 진리란 세계가 어떠한지와 무관한 진리이며, 따라서 그러한 진리를 표현하는 문장의 의미는 진리값에 의해 전적으로 결정된다. 따라서 필연적 진리를 표현하는 문장은 분석적이다. 반대로, 만약 어떠한 문장이 의미에 의해 참이라면 그 의미는 진리치를 참이게끔 전적으로 결정하며, 따라서그 문장은 모든 세계의 상태에 대해 참이고, 따라서 필연적이다. 즉 위의 답에 따른 분석적 진리는 단지 필연적 진리와 같은 관념일 뿐이다.
그러나 이러한 귀결이 바람직하지 못하다는 세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로, 형이상학적으로 필연적인 진리('실체적 진리')가 언어적 설명을 갖지 못하는 경우가 있을 수 있다. 삼각형의 내각의 합이 180도라는 것은 개념적 문제와 무관하다. 가능세계에 대한 초실재론자에 있어, 사실은 가능세계가 열 다섯 개 뿐이었는데, 그 모든 세계에서 [한정기술구] 새벽별이 저녁별이었다 할 때, 이는 의미에 의한 것이라고는 할 수 없다. 따라서 필연적 진리를 표현한다는 것과 의미에 의해 참이라는 것은 사소한 의미에서 등가이지 않다.
둘째로, 이름이 관여된 참인 동일성 문장들이 있다. 가령 "샛별은 개밥바라기이다"와 같은 문장을, 가령 고정 지시어라는 언어적 설명이 주어짐에 따라 의미론적으로 보증된 진리라는 이유에서, 분석적 명제로 잘못 분류할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있다. 그러나 이는 분석 문장이 아니다. 이 문장을 이해함으로부터 이것이 참이라고 여김이 정당화되지 않기 때문이다. 다만 진짜 우려는, [필연적 진리의 목록 중] 논리학자들이 논리적 진리로 여기지 않음에도 위의 문장이 참이라는 점에 있다.
셋째로, 분석적 진리와 필연적 진리를 표현하는 문장을 동일시할 경우 우유적 분석 문장을 잘못 분류하게 될 것이다. 카플란이 견지하기로, "내가 여기 지금 있다"는 분석적 진리이이면서도 우유적 진리를 표현한다.
실체적 진리, 이름이 관여된 문장, 또 우유적 진리를 표현하는 참인 문장이라는 세 종류의 문장들은 분석 문장이 단지 필연적 진리를 표현한다는 방식의 해명에 대한 귀결을 바람직하지 못하게 만든다. 다행히도, 이는 여기에서의 해명으로부터의 귀결이 아니다.
이하에서 논증되기로, 이는 두 거짓된 가정을 둔 해명의 귀결이다. 하나는, 진리값을 전적으로 결정하는 의미란 문장의 내용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문장의 진리치를 잉여적으로 결정하는 세계의 상태란 진리치를 평가받는 문장에 대응하는(against) 가능세계라는 것이다.
2. 의미
언어 신화[2.1]. 분석성에 관한, 오도된 통속적 견해의 요체는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다:
언어 신화 |
---|
(1) 표현을 이해한다는 것은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안다는 것이다. |
(2) 문장 안에 있는 표현의 의미는 그 문장 전체가 말하는 바에 기여한다. |
(3) 어느 대상에 표현이 적용될지는 그 의미로부터 결정된다. |
또 어떤 부주의한 전이론(pre-theoretic)적 관점들은 다음 논제를 수용할수도 있을 것이다:
언어 신화 |
---|
(4) 표현의 의미란 표현이 적용되는 바로 그것이다. |
언어 신화의 특징적인 점은, 논제 (1)-(3)이 언제나 단 하나의 것으로 만족된다는 가정이다.
이 그림에 자연스럽게 부가되는 이론적 배경은, 정의란 두 동의어적 표현에 관여하는 동일성 진술이라는 것이다. 어떤 이가 두 표현을 모두 이해한다고 하자. 그렇다면, (1)로부터 그는 둘 모두가 M을 의미함을 안다. 이는 그 어구들의 지시체가 반드시 꼭 같은 방식으로 결정된다는 것을 의미하며, 따라서 화자가 이를 안다면 그 의미가 똑같은 대상들에 적용될 수밖에 없음을 알 것이다. 동일성 문장은 참을 표현할 것이다. 이는 어구의 이해에 기초하여 알려지므로, 선험적이라 할 수 있겠다. 또한 이로부터 표현된 진리는 필연적이다. 이러한 문장들은 분명 특별한 것들로, 이를 분석 문장이라고 부르자.
전이론적 그림, 그리고 정의에 관여하는 확장된 이론 중 어느 것도 옳지 못하다. 이 이론이 요하는 바에 따라 작동하지 않는 다수의 언어적 표현들이 있으며, 이를 통해 의미란 다층적으로 애매함을 볼 수 있을 것이다. 다음의 새로운 말들을 도입하는 것이 도움될 것이다:
정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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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성 character | 화자가 표현을 이해한다고 여겨지기 위해 반드시 (암묵적으로라도) 알아야 하는 것 |
내용 content | 낱말이 이를 포함하는 문장이 말하는 바(표현되는 명제)에 대해 기여하는 바 |
지시 결정자 | 어떠한 표현의 지시체가 되거나 그 외연에 들어가기 위해 대상이 반드시 맞추어야 하는 조건 |
지시체/외연 | 그 어구가 적용되는 대상(들의 집합) |
언어 신화의 지반을 흔들기 위한 시도들은 다수의 20세기 철학자들, 콰인, 퍼트남, 버지, 크립키, 카플란, 도넬란, 에반스, 맥도웰, 솜즈, 새먼 등에 의해 이루어져 왔다. 아래에서는 이 중 두 개의 사례인, 크립키와 카플란의 작업만을 살펴볼 것이다.
크립키와 카플란[2.2]. 크립키가 《이름과 필연》에서 제시한 이름에 대한 그림은 내용, 특성, 지시 결정자를 기술구의 내용과 동일시한 형태의 언어 신화를 폭로하는 중대한 역할을 했다. 그런데 그의 대안적 그림에서 지시 결정자란 무엇인가? 한 가지 자연스러운 응답은, 그것이 표현의 사용과 지시체 사이의 사슬(chain)이라는 것이지만, 오히려 다음이 더 그럴듯한 대안인 것으로 보인다: 이는 세례자에 의해 (기술구를 사용하여, 내지 가리킴을 통해) 명시되며 또한 이름이 도입되었을 때 이름의 지시체를 골라내기 위해 사용되는 그러한 조건이다.
가령, 파인만이 된다는 것은 '이 태어난 아기를 "파인만"이라고 부릅시다'라고 세례자가 말했을 때 그 기술구를 만족하는 대상이 되는 것이다. 한편 이러한 지시 결정정자가 무엇이냐는 것은, 그 낱말을 배우기 위해 알아야 할 것은 아니다. 즉, 특성과 지시 결정자가 구분된다. 또 (오늘날의 밀주의 철학자들과 달리) 이렇게 확장된 크립키적 그림은 이름의 내용과 지시 결정자 또한 서로 다른 존재자임을 보여준다. "파인만"의 내용이란 그 자체인 반면, 지시 결정자는 그 이름을 도입하기 위해 사용된 조건이다.
그렇다면 언어 신화에서의, 내용과 특성을 동일시하는 부분은 어떻게 되는가? 이를 위한 그림은 카플란을 통해 제공되었다. 그의 그림에서 핵심은 '직접 지시'라는 생각으로, 이는 낱말과 문장이 그 뜻(sense)을 표현한다는 프레게적 그림에 대한 대안적 그림을 제공한다. 직접 지시 이론에 따르면 지시체는 프레게적 뜻이 아닌, 어쩌면 전-의미론적인 기제에 의해 결정된다.
그러나 지표어의 의미가 오직 그 지시체뿐이라는 주장을 한 적은 아니다. 오히려 지표어들은, 화자에게 알려져 있는, 그 지시체를 의미론적으로 결정하는 기술구적 의미를 갖고 있다. 다만 중요한 점은 지시체를 결정하는 기술구적 의미란 지표어를 포함하는 문장이 발화될 때 말해지는 바는 아니라는 것이다. 만델라가 "나는 분노했습니다"라고 말할 때, "이 맥락의 행위자는 분노했습니다"를 내용으로 갖는 문장을 발화한 것이 아니듯 말이다.
카플란과 크립키의 작업은 필연적 후험문, 우연적 선험문, 우연적 분석문에 관한 문제를 야기했다. 우연적 분석문에 관한 카플란의 예문은 지표어 및 그가 고안한 연산자 'dthat'에 관여한다:
예문 | |
---|---|
(D1) | 내가 여기 지금 있다. |
(D2) | α = dthat[α] |
(D3) | 내가 존재한다. |
(D4) | Φ이다 ↔ 현실적으로, 지금 Φ이다. |
여기에서 'dthat'은 기술구 α를 받아 직접 지시적 단칭어를 형성한다.
이 예문들이 공통적으로 갖고 있는 바에 대한 카플란의 진단은, 이것들이 모두 지시사의 논리에 있어[Kaplan, "Demonstratives" 참조] 논리적 진리라는 것이다. 이러한 진리들은 거짓되게 발화할 수 없는는 그러한 문장이다. 어떠한 맥락에서든, 그 분장은 참이 된다. 그러나 □(내가 여기 지금 있다)는 그러한 논리적 진리가 아니다. ["내가 지금 여기 있다"를 통해 표현되는 내용이 성립하지 않는 세계가 있을 수 있고, 거의 분명히 있을 것이므로.]
지시 결정자에 의한 진리[2.3]. 여기에서는, "의미에 의한 진리"에서의 의미란 내용이 아닌 지시 결정자임과, 나아가 두 요소설(two-factor story)을 따를 때 세계란 단지 평가 맥락일뿐 아니라 또한 발화 맥락 내지, 이와는 또 다른 맥락인, 도입 맥락임이 주장된다.
프레게를 따라, 문장의 의미가 그 부분들로부터 결정된다고 하자. 두 요소설을 따를 때, 하위표현의 값은 표현의 의미가 변동되거나, 세계의 존재 방식이 변동됨에 따라 변동될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의미"가 표현의 내용을 의미한다면 두 요소 이론은 붕괴한다. 가령 "개밥바라기"가 화성을 의미할지도 모른다고 할 수 있어 보이는데, 카플란이 지적했듯 이름의 내용을 결정하는 것은 지시체이므로, 가정된 변이는 불가능하다. 평가 세계에 근거하더라도 마찬가지이다. 이름은 고정 지시어이기 때문이다.
같은 실패가 지표적 직접 지시어에서도 반복된다. "나"의 내용은 발화 맥락에 따라 달라지므로, 발화 맥락의 고정은 내용의 안정을 함축한다. 여기에서 평가 세계란 "나"의 지시체 결정과 전적으로 무관하다. 반면 "나"의 지시 결정자는, "나"가 언제나 발화 맥락의 화자를 지시함을 일러준다. 같은 일이 이름에서도 일어나는데, 여기에서 한몫하는(salient) 사태란, 그 낱말이 언어에 최초로 도입되는 그러한 상황이다. 이를 "도입 맥락"이라고 부르자.
"개밥바라기"가 개밥바라기를 의미하는 데에는 두가지가 역할한다. "개밥바라기"의 지시 결정자와 도입 맥락이다. 만일 지시 결정자가 "붉은 별"이었더라면 "개밥바라기"는 화성을 의미했을 것이다. 그러나 지시 결정자를 고정하더라도 그것의 도입 맥락이 달라 화성이 보이는 때에 낱말이 도입되었더라면, "개밥바라기"는 화성을 의미했을 것이다.
두 요소설에 있어 내용에 관한 것으로 말해질 수 있는 표현들이란, 내용과 지시 결정자가 일치하는 그러한 표현들이다. 지금까지의 고찰은 다음을 이끈다:
- 두 요소설에서 의미란 지시 결정자이다.
- 두 요소설에서 세계란 평가 맥락이거나 평가 발화 혹은 도입 맥락이 될 수 있다.
이는 의미 함수(ℳ-function)를 ℳ'=⟨ci, cu, ce, ℛ, 𝒱⟩, 즉 도입 맥락, 발화 맥락, 평가 맥락, 지시 결정자, 평가 함수의 오중쌍으로 수정하게 한다. 그런데 "내가 지금 여기 있다"와 같은 문장은 지금까지의 해명에 따르면 의미에 의해 참이지 않은데, 평가 맥락에 따라 이것이 거짓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우리가 원한 귀결이 아니다.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은 카플란에 의해 제안되었다. 그는 발화 맥락이 나름의 평가 맥락을 포함하는 것을 허용하며, 그 평가 맥락이 행위자, 장소, 시간을 포함한다고 주장했다:
(정의 5) 발화 맥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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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화 맥락이란 행위자, 장소, 시간, 가능세계의 다음 순서쌍: ⟨a, p, t, w⟩이다. |
따라서 우리는 ℳ'을 ℳ*: ⟨ci, cu, ℛ, 𝒱⟩으로 수정할 수 있게 된다. 문장이 의미에 의해 참인 것은, 그 지시 결정자가 진리치를 전적으로 결정하는, 즉, 도입 맥락과 발화 맥락의 모든 순서쌍에 대해, 문장이 그 발화 맥락의 평가 맥락에서 참인 바로 그 때이다.
(정의 6) 의미에 의한 진리 (양상적 정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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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 S가 참인 것은 도입 맥락과 발화 맥락의 모든 순서쌍에 대해, S에 의해 표현된 명제가 그 맥락에 비추어, 모든 평가 맥락에서 참인 바로 그 때이다. |
분석적 진리의 사례들[2.4]. 이러한 해명 하에서, 다음은 의미에 의한 진리에 관련된 분류이다:
사례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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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미에 의해 참 | 모든 총각은 총각이다. 만일 최단신의 간첩이 있다면, 최단신의 간첩은 최단신의 간첩이다. 모든 총각은 남성이다. 내가 여기 지금 있다. |
지시한다면, [의미에 의해] 참 |
개밥바라기는 개밥바라기이다. 만일 개밥바라기가 존재한다면, 개밥바라기는 개밥바라기이다. 캐시어스 클레이는 무하마드 알리이다. 최단신의 간첩은 최단신의 간첩이다. 물(의 사례)인 모든 것은 물(의 사례)이다. |
의미에 의해 참이지 않음 |
눈은 희다. 개밥바라기는 샛별이다. 물(의 사례)인 모든 것은 H2O(의 사례)이다. |
두 반론과 중대한 문제[2.5]. 상기한 분석에 따라, 지시 결정자에 의한 진리의 개념이 정말로 의미에 의한 진리 개념이 될 수 있는지에 대한 두 반론이 있을 수 있다. 첫째 반론은, 지시 결정자가 반드시 의미이지는 않다는 데에서 기인한다. 가령, 이름의 지시 결정자는 이름의 의미가 아니다. 둘째 반론은 인식론적인 것으로, 설렁 지시 결정자에 의한 진리가 일종의 의미에 의한 진리였더라도, 그것이 분석성은 아니라는 것이다. 분석 문장은 그 문장을 이해하는 모든 이에게 알려져야 하지만, 가령 "무함마드 알리"라는 낱말을 잘 아는 이도 "무함마드 알리가 캐시어스 클레이이다"에 대해 모를 수 있다. 따라서 지시 결정자에 의한 진리는 분석성이 아니다.
두 반론은 기본적으로 수긍할 만한 것이다. 그러나 분석/종합 구분의 지지자들이 실제로 염두에 두고 있던 것이 곧 사실은 지시 결정자에 의한 진리였다는 것이 여기에서의 논지이다. 즉, 이는 의미에 의한 진리로 불리우던 것과 다른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또 분석 문장에 전통적으로 부가되던 인식적 속성을 지시 결정자에 의해 참인 문장이 갖지 않는 경우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 어쩌면 이는 "분석적 후험성"이라고 불릴 수 있는 사례이다. 그러나 애당초 분석성에 대한 그러한 부가는 여러 종류의 "의미"가 뭉뚱그려져 사용된 추론에 의한 것이다. 따라서 반드시 의미에 의해 참인 문장이 자동적으로, 그것을 이해하는 이가 그것을 아는 그러한 문장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한 가지 중대한 문제가 남아 있다. 1장에서 논했던 사례들 중, "저녁별은 새벽별이다"와 같은 실체적 필연성 문장을 생각해 보라. 이 예시는 두 순수 기술구에 관여하는 동일성 진술이며, 필연적 진리이다. 따라서 여기에는 도입 맥락에 민감한 표현이 없다. 그렇다면 이 문장의 필연성으로부터, 모든 평가 맥락에 비추어 참인 명제를 표현하게 될 것이며, 따라서 지시 결정자는 진리치를 전적으로 결정한다. 그런데 이는 잘못된 결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