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석-종합 구분Analytic/Synthetic Distinction

The Analytic/Synthetic Distinction(SEP)[링크]

대개 문장의 진리는 세계 내적 사실(worldly facts)에 의존한다. 가령, “김오늘은 철학과 학생이다”는 김오늘이라는 그 사람이 철학과 학생인지에 따라 참이거나 거짓이다. 그러나 어떤 문장들은, 의미론적 사실 외에는 아무 것에도 의존하지 않고 그저 참이다. 가령, “모든 철학과 학생은 학생이다”를 참이거나 거짓으로 만드는 세계 내적 사실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이 문장은 “철학과 학생”과 “학생”의 의미에 비추어 곧장 참이다.

전통적으로 철학자들은 전자를 “종합적”이라고, 후자를 “분석적”이라고 일컬어 왔다. 앞서 라이프니츠나 로크, 흄과 같은 철학자들 또한 유사한 것에 관해 말했지만, 이를 가장 명시적으로 말한 것은 칸트I. Kant였다. 그는 “분석 판단”을 통해 주어가 술어를 포함하는 그러한 판단을 일컬었다.

현대적 정의와 그 결과

그러나 “주어가 술어의 관념을 포함함”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그럼에도 충분히 ‘분석적’인 듯 보이는, 그러한 예문들이 존재한다는 점이 문제가 된다:

예문
(1) 모든 사물은 빨갛거나 빨갛지 않다.
(2) xy보다 크고 yz보다 크다면, xz보다 크다.
(3) 영희가 철수의 배우자라면, 철수는 영희의 배우자이다.

분석-종합 이분법이 성립한다면, (1)-(3)은 어떻게 보아도 ‘종합적인’ 판단을 요하는 듯 보이지는 않는다. 따라서 이들을 분석적이라고 보는 것이 옳아 보인다. 그러나 칸트의 정의–주어가 술어의 관념을 포함함–는 이를 분석 판단을 요하는 문장으로 간주하지 못하게 한다.

프레게G. Frege는 그가 일으킨 논리 혁명과 더불어, 상기한 사례들을 포괄할 수 있는 보다 너른 분석성 개념을 제안했다. 그의 분석성 개념은 다음과 같은 정의를 통해 설명될 수 있겠다: s가 분석적이다 iff s가 논리적으로 참이거나, s의 비논리 상항에 대해 이를 그 동의어로 대치함을 통해 논리적으로 참인 문장을 얻을 수 있다.

프레게의 이와 같은 분석성 개념은 20세기 초 철학의 흐름과 긴밀한 연관을 갖는다. 첫째로, 이는 수학적 논리주의에 대한 희망을 제공했다. 칸트에 따르면, “7+5=12”와 같은 단순한 산술적 문장마저도, 이 문장의 주어가 술어의 관념을 포함한다고 볼 수 없기에, 종합 판단을 요한다. 그러나 당연히도 수학적 명제를 후험적으로 알 수는 없으니, 수학적 지식은 '선험적 종합 판단'이라는 기묘한 인식론적 지위를 갖게 되었다.

그러나 프레게를 통해 칸트의 정의가 대체되었으므로, 철학자들은 수학적 명제의 인식론적 지위를 보다 안정적이게 만들 희망을 가질 수 있었다. 바로 수학적 대상들을 논리적으로 환원함에 따라, 모든 수학적 명제들을 분석적 명제로 만드는 것이다. 바로 이 흐름을 “논리주의”라고 일컫는다.

한편 과학의 언어에 대한 논리실증주의자들의 희망 또한 프레게의 기획으로부터 제공되었다. 논리실증주의자들은 과학적 진술들을 구성하는 요소들을 그 동의어로 대치하여, 그 진술을 그것의 검증 조건에 관한 문장들로 만든 뒤, 세계에 관한 모든 진술을 논리적 진술(이는 동어반복적이다) 및 경험적 진술로만 구성할 수 있을 가능성을 모색했다.

콰인의 “두 도그마”

현대적인 분석성 개념에 대한 (다른 것들은 제쳐두고서) 가장 잘 알려진 비판은 콰인W. V. O. Quine이 “경험주의의 두 도그마”에서 제기한 비판이었다. 콰인에 따르면, 분석성 개념은 그것이 바탕하는 동의성 개념이 이해될 수 없음에 따라, 마찬가지로 이해될 수 없다.

먼저 동의성을 사전적 정의를 통해 이해해 보자. 이는 곧장 부조리함에 처하는데, 두 표현의 동의성이 사전적 정의를 통해 주어진다기보다는, 그 반대로 사전적 정의가 표현의 동의성에 기초해 구성된다고 보는 것이 올바른 관점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동의성을 사전적 정의를 통해 이해하는 것은 순환적이다.

진리 보존적 대치(interchangeablility salva veritate)를 통해 동의성을 해명하는 것은 어떤가? 한편으로, e1e2가 동의적이라는 것은, 문자열 σ(e1)에 등장하는 모든 e1을  e2로 대치해 얻은 σ(e2)의 진리치가 σ(e1)와 같다는 것이라고 하자. 그런데 단지 이러한 절차를 통해 동의성을 해명하는 데에는 어려움이 있다. 가령, “술”의 동의어가 “알코올 음료”라고 하더라도, 문자열 〈그, 대, 의, 달, 콤, 한, 입, 술〉을 〈그, 대, 의, 달, 콤, 한, 입, 알, 코, 올, 음, 료〉로 대치할 때 진리치가 보존되지 않는다는 점이 둘의 동의성을 무마하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단어의 개념을 일단 원초적인 것이라고 쳐 보자. 이제 문제가 바뀔까? 그렇지 않다. 결국 동의성이란 인지적 동의성(cognitive synonymy)의 문제가 될 것이다. 한편 “술”과 “알코올 음료”가 인지적으로 동의적이라는 것은 곧

예문
(4) 모든 술은 알코올 음료이다.

가 분석적이라고 하는 것이다. 단지 (4)가 분석적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동어 반복이므로, 보다 강한 주장으로부터 (4)가 함축됨을 보인다면 동의성, 나아가 분석성이 해명될 것이다.

이에 대해 고려 가능한 후보는 양상 문맥에서의 진리 보존적 대치이다. 다음의 (5)에서 “술”을 "알코올 음료"로 대치하여 (6)을 얻을 때, (5)와 (6)의 진리치는 같다:

예문
(5) 필연적으로, 모든 또한 오직 술만이 술이다.
(6) 필연적으로, 모든 또한 오직 술만이 알코올 음료이다.

한편 (6)이 참이라고 하는 것은 곧 (4)의 분석성을 해명하며, 따라서 인지적 동의성이 해명되는 듯 보인다.

하지만 지금까지의 논의는 무언가 빙빙 돌고 있다. 콰인이 주장하길, 우리가 가정한 언어가 외연적 언어라면, 거기에는 “필연적으로”와 같은 내포 연산자가 있을 수 없기에 진리 보존적 대치는 인지적 동의성을 보장하지 못한다. 반면 그러한 종류의 내포 연산자가 있는 언어에서, 분석성의 개념은 이미 선제되어 있다. 따라서 (6)을 통해 (4)의 분석성을 해명한다는 것은 순환적인 시도이다. [이 문단에서 요약한 콰인의 입장에 관해 상당히 모호하게, 또는 이해할 수 없게 요약한 자료들이 많다. 아마도 논문의 전개 자체가 불분명한 감이 있어서 그렇다.]

끝으로 콰인은, 어떤 언어 L0 내에서 분석성을 정의하는 경우(“SL0에서 분석적이다 iff ...”)를 생각한다. 그러나 이는 엄밀히 말해 ‘분석성’을 정의한 것이 아니라, ‘L0-에서-분석적’을 정의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조금 다르게, ‘L0의 의미론적 규칙을 따름’을 통해 분석성을 정의할 수도 있겠지만, 이 때에는 또다시 정의되지 않은 개념인 ‘의미론적 규칙’이 사용되고 있다는 점에서 전혀 진전을 만들어 주지 못한다.

따라서: 분석성은 이해될 수 없거나, 올바르게 정의될 수 없다.

콰인 이후의 접근들

SEP는, 콰인 이후의 분석성에 관한 대응들을 네 갈래로 소개하고 있으며, 그 중 철학적 대응들은 다음과 같다(그 외에 보다 고전적인 논쟁사에 대해서는, A. C. 그렐링의 책, 《철학적 논리학An Introduction to Philosophical Logic》을 참조):

  1. 신(新) 데카르트주의: “직관”이라는 내적 능력을 통해 어떤 주장들의 참임이 직접적으로 “포착된다”고 주장하는 갈래의 대응이다. 본주어, 빌러, 캇츠 등이 이 입장에 해당하는 것으로 소개되고 있다.
  2. 의미론적 외재주의: 외재주의자들에 따르면, 어떤 표현의 의미는 그 표현이 취해진 특정한 조건과, 이에 관련된 (인과적) 법칙에 의해 부여된다. 따라서 이들은 동의성을 위해 심리적 요소에 호소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이 경우 “물은 H2O이다”와 같은 명백히 경험적인 명제를 분석적 참이라고 간주해야 한다는 역설이 발생한다.
  3. 설명적 전략: 이 입장은 어구의 의미론적 속성이 그 어구의 사용에 관한 기초적인 설명적 역할을 한다는 데에 호소한다. 이는 데빗과 호위치 등이 견지하는 입장이다. 그러나 이 역시 많은 문제를 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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