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교, 그리고 성서의 정체성

누군가가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예수를 우리의 최종적인 구원의 표지로 삼는다는 것이다. 정확히는, 예수라는 인물에 얽힌 어떤 고백들을, 구원에 관한 나의 최종적이고 표지적인 고백으로 삼는다는 것이다. 역사 속에 있던 어떤 인물이 있었고, 바로 그 인물을 우리는 예수라고 부른다. 그리고 바로 그 예수에 관한 증언과 고백들로부터, 우리는 구원 내지 실존적 해방에 관한 지침을 얻는다.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고백이다.

한편 한가지 분명한 역사적 사실은 바로 그 예수라고 불리는 인물이 1세기 유대인 사회 안에 속해 있었다는 것이다. 또한, 그 인물에 관한 고백과 증언을 남긴 이들 역시 그러했다. 예수와 그의 추종자들은, 구원에 관한 고백을 오로지 그들의 배경이었던 히브리 성서 및 신학에 근거하여 구성했다. 예수, 그리고 그 추종자들의 행적을 이해하기 위해 히브리 성서와의 연관을 가져야 한다는 것은 이로부터 나오는 직접적 귀결이다. 따라서 적절한 그리스도인은, 히브리 성서와의 연관을 갖는다.

그 연관의 성격은 무엇인가? 이는 이중적이다. 한편으로, 구원이란 무엇인지에 관해 예수와 그의 추종자들은 히브리 성서에 근거한 개념을 가졌다. 따라서 히브리 성서는 우리에게 우리가 고백하는 구원이 어떠한 유형의 사건인지 알려준다. 이는 언약적 측면에서 히브리 성서가 갖는 특성이다. 다른 편에서, 예수의 추종자들은 히브리 성서에 근거해 예수의 정체성을 이해했다. 이는 예수가 어떠한 인물인지를 히브리 성서가 알려줌을 뜻한다. 이는 구원사적 측면에서 히브리 성서가 갖는 특성이다.

이렇게 우리는 예수와 히브리 성서를 우리의 신앙에 주어진 두 핵심적 근거로 갖는다. 이로부터, 우리가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고백할 때 실지로 고백하는 것은 그 예수에 관한 고백이 히브리 성서에서 고백되고 진술되었던 구원의 사건에 관한 최종적 상징이라는 것이 된다.

그렇다면 이제 성서, 특히 히브리 성서의 정체성을 생각해 보자. 우리가 성서의 진술들을 진리라고 주장할 때, 때로 우리는 그것이 역사적 기술의 측면에서 진리라고 여긴다. 즉, 성서가 담고 있는 여러 서사들이 실제로 역사적 사실과 대응되는 어떤 것이라고 생각하곤 한다. 이러한 주장은 얼마나 타당한가? 나의 생각은, 전혀 타당하지 않다는 것이다.

왜 그런지를 간략히 말하자면 이렇다. 우리가 히브리 성서를 진리라고 고백할 때 그것은 예수를 이해하기 위한, 그리고 예수 이후 신학적 개념들을 이해하기 위한 근거를 마련한다는 점에서, 진리라고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이 고백은, 히브리 성서가 기술하는 바가 그 자체로 진리라는 것과는 구분된다. 왜냐하면 우리는 예수를 이해하기 위한 해석학적 틀로서 히브리 성서를 진리로 수용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구원이란 무엇인가? 천국이란 무엇인가? 하느님이란 무엇인가? 이 질문에 관한 예수 및 그의 추종자들의 답은 히브리 성서에 근거했다. 따라서 예수 및 그의 추종자들의 진술과 증언을 이해하기 위한 준거 텍스트는 히브리 성서이다. 그러나 이는 히브리 성서의 각 진술들이 기술적으로 참이라는 보증을 주는 것은 아니다. 만일 그러한 진술과 증언들이 히브리 성서의 그것을 기술적으로 참이라 주장했다면 모르겠지만, 우리는 그러한 주장을 받은 적도 없다. 이렇게 히브리 성서의 기술적 진리성은 의심스러운 것이 된다.

이제 다른 성서인, 예수 및 그의 추종자들의 진술과 행적, 고백에 관해 생각해 보자. 이러한 것들을 담은 문헌인 신약 성서의 기술을 진리라고 주장할 때, 우리는 무엇을 주장하는 것인가? 우리가 무엇을 믿는지를 주장한다. 그런데 이 때 믿는다는 것은 어떤 기술적 사실을 믿는다기 보다는 어떤 구원론적 사실, 초월적 사실을 믿는다는 것으로 생각된다. 우리가 그리스도에의 신앙을 무엇으로 고백하는지, 우리가 구원의 결과를 무엇으로 고백하는지는, 성서가 기술적으로 참인 텍스트라고 이해되어야 하는지의 여부와는 무관하다. 후자는 전자를 지지하지 않으며, 지지할 수도 없다.

이러한 이유에서, 성서의 정체성은 기술적인 무언가로 이해될 이유가 딱히 없어 보인다. 차라리 성서의 정체성은,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때 실지로 믿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려주는 준거점이라는 데에 있다. 그 준거점 위에 서기 위해 우리는 성서의 여러 서사들을 연구하고, 배우며, 이해하는 것이다.

혹자는 다시 이렇게 답할 수 있다. 그럼에도 성서는 기술적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창조, 타락, 구원에 관한 철학적 이해, 그리고 그것의 역사적 예증 가능성 주장을 위해 성서의 몇몇 서사들은 기술적으로 참이라고 이해되어야만 한다. 그런데 나는 이러한 주장이, 성서의 위치를 해석학적 준거점이 아닌 그 자체로 신앙의 대상으로 여기는 태도에서만 타당하게 나올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그러한 주장의 전제는 그릇되었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적어도 필수적인 것은 아니다.

이러한 생각으로부터 갖는 나의 신념은 이런 것이다. 성서의 어떤 서사에 대해서도 우리는 그것에 비판적으로 접근할 수 있다. 다윗이 이러저러한 계시를 들었다고 주장하는 대목에 대해, 또는 어떤 선지자가 이러저러한 계시를 받았다고 주장하는 대목에 대해, 우리는 반드시 그 대목이 실제로 하느님으로부터 온 것이라고 주장하지 않을 수 있다. 대신, 그들이 하느님의 계시로서 그러한 진술을 주장했다고 말해야 할 뿐이다.

또한 예수 및 그 이후의 신앙적 사건들에 관한 여러 진술에 대해서도 비판적 접근이 가능하다. 예수에 관한 진술에 대해, 성령 체험에 관한 여러 진술에 대해, 우리는 반드시 그 진술들이 실제로 그리스도나 성령에 관한 것이라고 주장하지 않을 수 있다. 다만, 그 진술들이 갖고 있는 핵심적인 개념적 원리로부터, 그리스도나 성령이 어떤 것인지 말해야 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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