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적 귀납법과 형이상학의 가설-연역적 승인

내가 ‘철학적 귀납법’이라고 말할 때, 의도하는 바는 이런 것이다. 여러가지 철학적 입장에 비추어 볼 때, 상당수가 c를 귀결로 갖는다. 따라서 c를 승인하는 것이 매우 설득력있다. 우리는 어떤 존재론을 가질 것이냐와 별개로 c를 승인할 좋은 이유를 갖는다.

한편 과학적 귀납법과 유사한 종류의 다른 철학적 추론이 있다. ‘형이상학의 가설-연역적 승인’ 혹은 ‘형이상학적 가설-연역법’이라고 부를 만한 이 방식은 이렇다. A의 철학이 갖는 귀결인 c는 타당한 절차 P와 전제 a에서 나온다. P가 타당하고 그 귀결인 c가 참이라면, a가 승인된다.

이 추론이 타당한지에 관한 고민을 갖고 있다. 이 추론이 타당하다면, 우리는 논증의 귀결과 전제가 모종의 가역적 관계를 가짐을 인정하는 셈이다. 즉, 한 논증의 결론을 받아들인다면 그 전제를 자연스레 받아들인다. 그러나 과연 그러한가? c를 귀결로 갖는 타당한 논증이 오로지 a만을 전제하는가?

c가 참이며 P가 유일한 c에의 논증 절차인가? 일단 P가 유일한 절차가 아니라면 a는 c의 참과 P의 타당함으로부터 필함되지 않는다. 만일 다른 절차 P’가 있었더라면, 그것은 전제에 a를 갖지 않았었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만일 그 P’가 전제에 a를 가져야만 한다면, 적당한 절차에 따라 P’는 P로 환원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만일 정말로 P가 유일한 c에의 논증 절차라면 어떤가? 물론 그 때엔 a를 받아들이는 것이 불가피해 보인다. 그런데 동시에 a가 아주 반직관적인 논제일 수 있다. 과연 a를 받아들이면서까지 c의 참됨과 P의 타당성을 승인해야 하는가?

여기에서 나오는 반응이 대표적으로는 크게 둘이다. 하나는 c를 논박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는 c가 너무 자명하거나, c를 따르고 싶은 경우엔 불가능하다. 다른 하나는 P를 거부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위의 가정을 생각하자면) c마저 거부하게 한다.

제3의 길은 없는가? 아마도 a에 다른 해석을 부과하는 일이다. 즉 표면적으로는 a가 거부되겠지만, a에 대한 다른 해석 a’와 P를 통해서도 c를 얻을 수 있다. 따라서 a는 무해하게 취급된다. 하지만 이것이 충분히 가능한지는 문제시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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