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식적 정의”

비평은, 철학은, 신학은, 대상 담론에 참여할 수 있는가? 그렇지 못하다는 것이 타당하다. 두 이유에서 그렇다.

첫째, 비평 일반은 어떤 대상들의 존재 양상을 설명하는 행위이다. 그런데 대상이 되는 담론에 그것이 참여한다면, 그것은 스스로에 관한 언술을 내포한다. 이는 순환적이다. 한편 이는 명시적인 순환이므로, 나쁜 순환이다.

둘째, 비평 일반은 어떤 대상의 유적인 본질을 설명하는 행위이다. 그런데 대상이 되는 담론에 그것이 참여한다면, 그것은 메타 분석이 아닌 일차적 분석이 된다. 이는 유적 본질이 아닌 개별적 내용에 관한 분석이다. 따라서 올바른 비평이 아니다.

불트만은 계시의 개념에 있어, 우리는 그것의 구체적 본질이 아닌 형식적 개념만을 말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콰인에 따르면 개념은 존재론 의존적이며, 철학은 메타언어를 이용한 분석이다. 에크하르트의 신비주의는 본래적 하느님의 분석 불가능성을 주장한다.

이러한 주장들은 비평 일반의 본질을 생각하게끔 한다. 그것은 이루어지는 담론들의 이러저러함을 발견하는 과정으로만 타당하다. 우리는 비평을 통해 어떤 비평이 참이거나 거짓임을 말하지 못한다. 대상담론의 부분합을 통해서만 그것이 발견된다.

칸트가 주장한 예지계와 현상계 사이의 인간 개념은 이러한 우리 처지를 잘 드러내는 듯하다. 현상들을 바라볼 때는 어떤 법칙도 보이지 않는다. 단지 우리는 법칙의 몇가지 성질과 그 형식적 내용만을 안다. (자연주의적인 해례에서) 어떤 것이 옳은지는 우리에게 주어진 내재적 이성을 통해서만 분간된다.

따라서 이성을 통해 어떤 구체적인 내용을 발견하려는 시도는 무의미하다. 그것은 내용을 가질 수 없다. 어떻게든 구체적인 사실을 발견하려면 실존적 도약, 존재론적 개입, 성육신 등의 과정이 요구된다. 그리고 현상계를 살아가는 한 그 과정에의 참여는 의무이다. (“내용 없는 직관은 공허하다.”)

(그런데, 그렇다면 이 메모는 무엇인가? 비평에 관한 비평이 어떻게 가능한가? 나의 말은 전부 헛소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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