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학고자

어떤 발제를 마치고 나서,

여정씨는 현대철학을 하셨다보니 역시 이런 걸 잘 정리를 하셨네요. 그렇지만 K의 한계는 그 시대의 한계이기도 하고, 이런 걸 비판점으로 보아야 할지는 생각해 보아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 땐 그저 웃으며 넘기긴 했지만, 돌아보니 적어도 두가지 불만이 있다.

하나. 나는 철학도지 고고학도가 아니다. 내가 할 일은 어떤 이의 보편적 주장을 평가하고 그 평가를 논증화하는 것이다(라고 나는 믿는다). K는 보편적인 철학적 구조를 말했고, 나는 공부하는 이로서 그의 논증을 비판했다. 철학사 연구가라면야 그의 철학사적 의의에 주목하겠지만, 철학도가 과거의 철학자를 “봐주면서” 그의 논증을 마냥 존경해야 한다는 것은 영 이상하다.

둘. 현대철학을 안 하는 사람이 어디에 있나. 말이야 멋있어서 고대, 중세, 근대 철학과 대비되는 개념 같지만 사실 현대철학이란 동시대에 이루어지는 철학 일반을 가리키는 지표어이다. 모든 사람은 현대철학을 하고 있고, 하는 것이 맞다. 다른 시대의 철학은 다른 시대의 문제의식에 관한 것이기에 후자 또한 그렇다. 현대인으로서 다른 시대의 철학서를 읽을 수는 있지만, 다른 시대의 “철학을 하는 것”은 시대착오적 행위라고 생각한다.

맞다. 나는 철학사를 거의 모른다. 기껏해야 B철학 전통에서 자주 끌어오는 칸트나 라이프니츠, 데카르트 정도를 안다. 기껏해야 이전에 공부했던 들뢰즈, 벤야민, 베르그손, 니체, 스피노자 정도를 안다. 데카르트 이전으로 가면 숨이 탁 막힌다. 신학을 통해 접한 안셀름, 둔스 스코투스, 아퀴나스 정도만을 약간 안다. 고고학자보다는 고학고자에 가깝다. 그럼에도 마이스터 에크하르트나 브렌타노의 글을 읽기보다는 루이스나 데이빗슨의 글을 읽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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