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

한 줄 한 줄이 딱 오는 그런 글은 실제로 아무 의미도 갖지 않을 공산이 크다. 글의 의미는 한 줄이 아닌 전체 글로부터 오며, 더 나아가 그 글이 놓인 맥락에서 오기 때문이다. 글을 알아듣게 쓴다는 것은 따라서 멋진 말을 모자이크처럼 설치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말들의 순서를 조리있게 두는 것이며, 그 순서로 구성된 말을 또한 삶의 맥락에서 순서에 맞게 내보이는 일이다. 로티는 철학을 대화의 방식이라고 한다. 하지만 철학이 대화의 매체라고 해서 사실을 드러내길 꺼려서는 안 될 일이다. 대화의 목적은 알아듣게 하는 데에 있기 때문이다. 대화를 매개로 한다면, 먼저 철학은 알아들을 수 있는 방식으로 스스로를 드러내야 한다.

(누군가는 여기에서, ‘어떻든간 감성을 자극하는 철학적 문체도 어떤 대화를 매개할 수 있지 않겠어?’라고 물을 것이다. 그렇다면 난 이렇게 답한다. ‘그 때 자극되는 것은 감성이므로 전해지는 것은 저자의 의도가 아닌 스스로의 자기반성이다. 그런데 그는 문학이 아닌 철학을 읽기에 자신의 감상이 사실에 대한 믿음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 귀결은 꽤나 자폐적인 것이 되지 않겠는가?’)


10/16 덧) 아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모든 글이 조리있게 위치해있다고 가정하고 읽어야 한다. 그것이 자비의 원리이다. 자비의 원리가 없이는 어떤 의사소통도 불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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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확정자 그리고 두 종류의 현실주의

가브리엘 콘테사는 이 논문에서 양상 현실주의를 '순한맛'(softcore) 현실주의와 '매운맛'(hardcore) 현실주의로 구별한다. 전자는 스톨네이커로 대표되는 전통적 현실주의이고, 후자는 성향주의로 대표되는 새로운 현실주의이다. 저자는 후자에 대해 제기되는 문제에 대응하고 전자에 대해 새로운 문제를 제기하며 매운맛 현실주의를 옹호하고자 시도한다.

변화들: 다시 여는 말

블로그에 몇 가지 변화를 줬다. 1. 주소를 바꿨다(https://philtoday.kr). 보다 오랫동안 사용하고, 뉴스레터와 연계하기 위해 오래 전부터 계획하던 생각이다. 이에 맞추어 외부용 메일(wj@)과 뉴스레터용 메일(newsletter@) 역시 본격적으로 사용할 예정이다. 명함에 반영해야지. 2. 블로그 이름도 바꿨다. “백야”를 버리고 “오늘의 철학”으로 왔다. 사적인 공간의 이름이었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