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 러셀의 찻잔

차 끓이다가 문득 생각나서 쓰는 중이다. K는 칸트의 줄임말은 아니다. 딱히 나의 모습을 투영한 것도 아니다. 내 이야기를 써 볼까 하다 식상해서 그만 두었다. 나는 홍차를 자주 마시긴 하지만 우연히 그런 것이고, 실제로는 백차를 좋아한다. 비싸서 못 마신다. 학교 도서관 서가 700번대에 만화가 많다는 것은 도서관 근로장학생을 하며 알게 된 사실이다. 재미있고 심오하고 신기한 많화가 많이 있다.


내가 K를 알게 된 것은 최근의 일이다. 철학을 전공한다고 했다. 그 점 치는 거 배우는 곳이요,잘 알지도 못 하는 나의 말을 듣고 처음 본 K는, 네 흐흐, 하며 사람 좋은 웃음을 지었다. 듣고 보니 철학 전공이라는 것이 점 치는 일과는 멀다는 모양이다. 정작 가서 배우는 것은 논리학이니 명제니 인과니 이런 것들이라고, 그는 러셀을 좋아한다고 했다. 러셀이요 그 찻잔 깨먹은 사람인가 그 사람 아닌가요, 잠시 고개를 갸웃하다, 아 러셀의 찻주전자요 예 그사람 맞습니다 흐흐, 하고 또 사람 좋은 웃음을 지었다. 언제나 K는 그런 식이었다. 참 한결같이 사람 좋은 식으로 처신하는 사람, 나에게 그는 그런 이미지로 있다.

차 마시는 취미가 있어요; 차요, 무슨 차요 저도 녹차를 좋아합니다 집에 티백을 쌓아두고 있는 걸요; 저는 홍차를 주로 마셔요 아쌈 홍차; 아쌈이요, 무슨 이름만 들으면 쌈채소같은데; 비슷해요 흐흐, 그러면서 K는, 자기는 티백으로가 아니라 찻주전자와 찻잎으로 차를 마신다고 했다. 아 아직도 그런 사람이 지구에 있는가요; 네 어쩌다보니 아직 이렇게 남아 있네요 흐흐. 또 사람 좋은 웃음. 며칠 후 우연히 차 이야기가 다시 나와서 (이 때 주제는 BMW와 메르세데스가 무슨 관계냐는 것이었긴 했지만) 왜 차를 마시게 되었냐고 물었다. 말인즉 언제 한 번 엄청 추운 겨울이 있었는데 도저히 물을 못 마시겠어서 끓여 먹어 보았는데 영 밍밍한 것이 맛이 없었다고, 그래서 차를 끓이기 시작했다고 한다. 먹어버릇하다보니 좋아요 물도 많이 마시게 되고, 나는 한 번 먹으면 물을 일 리터는 먹게 되더라구요 평소에 물 잘 안 먹게 되니까 좋은 거지 뭐 흐흐. 그러면서 나한테도 차를 좀 끓여마셔보란다. 티백으로는 마셔봐야 한 번에 200ml 아니냐고 하면서. 아 그런가요 저는 평소에 물을 많이 마셔서 괜찮은 것 같습니다 흐흐. 한 번 그의 말이라도 따라해 보며 받아쳤다.

그렇게 한 삼 주 K를 볼 일이 없었다가 지난주 수요일에 우연히 그를 마주쳤다. 공부하러 오셨나요; 네 곧 기말레폿도 준비해야 하니까요; 저는 공부하기 싫어서 도서관으로 도망 왔습니다, 700번대 중반에 만화가 많아서 좋아요; 아 그런가요 흐흐; 괜찮으면 차나 한 잔 하러 가죠; 그래요 그럼. 다시 화제가 차로 튀었다. 저도 차를 잎으로 사서 끓여먹고 있습니다, 저는 백차가 취향에 맞더라구요 마일드해서; 그래요, 그거 좀 고급 취향인데, B씨 막 담배도 이제 파이프 담배 입문하고 그러는 거 아니에요; 이미 파이퍼입니다 흐흐; 아 진짜요, 역시 사람이 다 비슷비슷하고 그러네요; 아 그런가요.

그러다 K가, B도 찻점을 쳐봐요 한 번, 이라고 말했다. 찻점이요, 하니 그가 말하기로 찻잎을 갖고 점을 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주전자에 차를 끓이지 말고 찻잎을 바로 찻잔에 넣은 다음, 차를 다 마시고(찻잎까지 먹지는 말아야 한다; 찻잎이 없다면 점을 칠 수가 없을 테니) 남은 찻잎의 모양에 따라 자신의 질문에 답이 나온다고 했다. 그러면 차를 마셔도 물을 많이 마시게 되지는 않겠어요, 흐흐. 이번에는 K가 사람좋게 웃어넘기지는 않았다. 어쩌면 별다른 대답을 안 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웬 갑자기 점이에요, 진짜 철학관 차리게요, 라고 물었더니 다시 사람 좋은 얼굴로, 그런 건 아니고 어쩌다 한 번 해 봤는데 잘 맞더라구요, 흐흐. 쩌번에는요, 갑자기 초등학교 동창 애가 전화를 해서 잠깐 나오라고 하길래 찻점을 쳐봤더니 나가지 말라는 거예요—K는 서른 조금 넘은 박사과정생이다—, 아니나다를까 다른 애들도 걔한테 연락 받고 나갔대서 나중에 들어보니 완전 이상한 놈이 되어서 돈 뜯고 다닌다고 하더라구요. 또 얼마 있다가는 과외 학생을 구하는데 월 100준다는 집이랑 40준다는 집이 되는 시간이 겹쳐서 점을 쳐봤는데 40주는 집으로 가라는 거예요, 그래서 갔더니, 웬걸 걔 친구들 여럿이서 받겠다고 해서 150 받기로 했어요. 네 명 봐주는 걸루. 그리고 또 언제는 … 찻점이 이렇게 잘 맞는 걸 보니 앞으로 자주 써먹어야겠어요. 그러니까 B도 한 번 찻점 봐봐요. 혹시 아나, 이걸로 로또라도 될지.

그냥 그러려니 하며, 아 그래요, 하고 차를 비운 뒤 도서관을 나왔다.

어젯밤 K가 속한 학회 모임 뒤풀이에서 (부끄럽지만 나도 회원이다) 그를 만났다. 이상하게 능글맞던 것은 어디로 갔는지 K의 얼굴이 완전 울상이었다. K씨 왜그래요, 평소랑 좀 달라보이네. 레폿때문에요. 아 그 기말레폿? 네 찻점 말한 거 기억 나죠 B씨, 레폿 주제를 못 정하겠어서 찻점으로 주제를 정해봤는데 완전 깨졌어요 그 레폿 그게 뭐라고 이렇게 혼이 나는 걸까요. 말을 들어보니 분석철학 세미나를 듣던 K는 기말 레포트를 건조한 주제 둘과 문학적인 주제 하나 중 어떤 것으로 할지 후보를 만들고 고민했다는 모양이다. 그러다 찻점이 문학적인 것을 골라서 (말하기로는 언어의 한계에 대해 우리가 말할 수 없다는 것이 어떤 “실존적 의미”를 갖는지 운운 하는 주제였다는데) 그것에 따라 레포트를 냈다고 한다. 기말 발표회에서 그대로 레포트를 읽는데 교수 심기가 불편해 보이더니 발표 중간에 말을 끊고 “아니 그 K 선생, 지금 자기가 어디 앉아있는지는 아는 거야? 논문도 이렇게 쓸 거야?”라고 하더니 연구실로 불러서 이러면 너 지도 안 할 거라고, 괜찮은 사람인 줄 알았는데 실망이라고, 너가 석사 받은 놈이 맞냐고 막 다그쳤다고 한다.

교수한테 미안하다고는 했는데 영 교수가 표정을 피지를 않네요 이번엔 회식 때도 안 불러 주시고; 아 그래요 그거 좀 큰일같이 들리는데; 그러게요 우리 전공이 단합력이 좋아서 무슨 일이 있어도 회식은 하는데 이번엔 나를 그냥 무시하더라구요; 에이 그 찻점이 아주 문제네; 그러게요 이제 찻점은 끝이에요 어휴. 처음으로 K가 한숨 쉬는 것을 들었다. 하루 종일 K는 우울해 보였다. 카운터에 온종일 내던 신청 곡도 한 곡 겨우 내고, 괜한 맥주만 연거푸 따라 마셨다. 옆 테이블의 아저씨들이 술을 대신 사주겠다고 나섰으니 망정이다. 아니었다면 우리 술값이 꽤 나왔을 터였다.

택시를 타야 하는데 좀처럼 잡히지가 않았다. 막차 시간 이전에 나왔어야 했는데, 하다 보니 또 차였다. 그놈의 차, 차, 차, 술자리 내내 K랑 찻점 이야기를 한 탓에 도로의 차들이 전부 찻잔처럼 보였다. 저이들도 자기 차로 점을 치려나, 싶다가 취했다는 걸 깨닫고 집까지 슬슬 걸어가기로 했다. 한시간 쯤 걸으면 술 좀 깨겠지. 취기인지 객기인지를 부리면서 걸어 집에 갔다. 겨울 바람이 차갑다.

그 후 K가 어떻게 되었는지, 어떻게 될는지는 잘 모르겠다. 이제 어떻게 할지에 대해서도 찻점에 대충 맡겨 보는 것은 아니려나, 싶다가도 된통 혼났으니 이제 그만 두려나, 싶고 잘 알 수가 없다. 아니면 나도 찻점으로 K가 어떻게 될지 보아야 하는 것일까. 그러다 주전자에 백차를 넣고 한 번 끓여 마신다. 찻점은 이제 꽝이다 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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