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배를 그만 피워야겠다고 생각했다. 파이프에서는 반 보울 정도를 채울 숯덩어리가 떨어졌다. 떨어진 재 위로 연기가 한 가닥 피었다. 몸체의 열기가 가시고 난 뒤에는 평소와 같이 파이프를 닦아 냈다. 파이프를 닦는 과정은 꽤나 고루한 일이다. 모든 일은 큰 것에서 작은 것으로 향한다. 휴지를 접어 묻어 있는 잿가루와 고인 담배진을 쓱 닦아내고, 주둥이와 목에 남은 것들을 길쭉한 클리너를 집어넣어 제거한다. 다시 클리너를 접어 챔버를 닦았다. 이제 파이프는 하루 이틀 정도 말려두어야 할 일이었다. 모든 것은 평소와 같았다. 열어 놓았던 창문을 닫자 공기청정기가 요동쳤다. 켜 두었던 향초는 열심히 타고 있다. 머리가 조금 아프고 구토감이 들었다. 낮에 난 상처에서는 더이상 피가 나오지 않았다.
이것 봐, 니코틴이 혈관을 수축시킨대. 휴대전화 화면만 보고 있던 K가 처음으로 고개를 들고 입을 열었다.
“담배를 피우면 피가 잘 안 흐른다는 거야?”
“모르겠네. 혈압이 올라간다는 걸 보면 그런 말은 아니지 않을까? 여튼, 그래서 시골에서는 피가 났을 때 담뱃잎으로 상처를 지혈하기도 한다더라구. 그쪽 혈관이 좁아져서 피가 빨리 멎는다는 모양이야.”
“그래? 어디 가서 피나면 담배부터 꺼내야겠네.”
그러게. 하하. 시덥잖게 이야기를 마친 것이 지난 겨울의 일이었다. K와 소원해진 것은 얼마 되지 않은 때였다. 오랜만의 데이트였고 오랜만의 술자리였다. 나 일 그만두려구, 소주를 반 병쯤 비우자 K는 그렇게 말했다.
“왜? 지금 직장 좋다고 했잖아.”
“아니, 좋긴 좋은데, 왜 그런 거 있잖아. 더 큰 사람이 되고 싶다거나,”
“큰 사람?”
해외로 나가고 싶다는 것이었다. 이미 대학원에 이력서도 보내 두었고, 합격하는대로 직장을 그만둘 생각이라고 했다. 별 것 아니라고 생각했다. 나도 해외에 나가 공부를 더 하고 싶었으니까. K가 유학을 간다면 나도 곧 따라가면 될 일이었다. 이런 때를 대비해 이력서를 미리 만들어 두기도 했었고.
“나 학교 붙었어.”
축하해. 라고 말하려는데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K의 표정은 얼마 전의 것과 달리 심하게 굳어있었다. 축하한다는 말 대신, 왜 표정이 그래, 라고 물었다. 사정인 즉슨 학교에 붙었으니 나와 함께하지 못해 아쉬운 표정이라는 것이었다. 나도 같이 가면 되지. 안 돼, 같은 학교에 가리라는 보장도 없고 P 대학교에는 너 전공도 없잖아. 근처 학교라도 괜찮잖아. 아니야, 그걸 어느 세월에 기다리라구. 아니면 너네 집 가정주부로 날 고용하든가, 라고 말하며 웃는 때 K의 얼굴에 화난 기색이 돌았다. 그런 소리 하지 마. 우리 이제 그만 만나자. 그렇게 K는 휙, 사라졌다. 아마도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새 학기를 시작했을 터였다.
엊저녁 무거운 술자리를 친구들과 마치고 집에 들어오는 길 낯익은 뒷모습이 보였다. K였다. 분명히 알아볼 수 있다. 그런데 왜, K는 유학을 간다고 하지 않았나. 그는 나한테 거짓말을 한 것이었을까. 차마 그 뒷모습을 뒤집어 볼 용기가 들지 않았다. 그게 K였다면 내겐 끝없는 의문이 생길 것이고, 나는 그 의문을 그에게 물어볼 수 없는 사람이니까. 지하철을 타는 대신 발길을 돌려 버스를 탔다. 돌아가는 길이지만 나쁘지 않다. 아니, 나쁘다.
크림을 바르고 면도칼을 들었다. 전날 본 모습이 눈에 아른거렸다. 내가 본 그 등이 K의 등이었을까, 역시 얼굴을 보았어야 했을까, 얼굴까지 같더라도 K가 아니었을 수도 있지, 내가 모르는 쌍둥이었을 거야, 아니 그럴리가, 수많은 생각이 지나갔다. 흰 턱 위로 붉은 점이 솟았다. 갑자기 마음이 초조해지고 눈앞이 아득해졌다. 타일 위에 벌러덩 누워 한참을 생각했다. 피는 멈출 줄을 모르고 흘렀다.
내 피는 묽은 것일까 굳은 것일까. K는 무슨 말을 했던가. 나는 그의 말을 믿을 수 있을까. 담배는 내 피를 멈추게 하는 것일까 멎지 못하게 하는 것일까. 어쩌면 둘 다인가. 더이상 담배를 피우지 않아야겠다고 생각한 것은, 그 즈음의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