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한 형이상학적으로도”

하나의 사건이 추후에 재현될 수 없음에 대해 이전 글에서 “(나는 또한 형이상학적으로도 그것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라고 덧붙였다. 왜 그런가?

“야기되는 것”이라는 사건의 정의는 적어도 그것이 특정 시공간 점에서 나온 결과임을 의미한다. 그런데 그러한 점에서 나왔다면, 그 사건은 그 점에서 재현 또는 표상되어야만 한다. 그런데 바로 그 표상은 주체(그것이 물리적이든 오로지 정신적이든)을 통해 일어나는 표상이다.

주체의 표상이 물리적이라고 하자. 그렇다면 바로 그 물리적 주체는 그 사건이 일어난 시공간적 점을 재현하여 표상하여야 한다. 그런데 그것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 물리적 시간을 뒤로 돌리는 것은, 세계가 합리적으로 작동한다는 우리의 가정에 따르면, 우리 세계의 합리성 안에서,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주체의 표상이 정신적이라면 어떠한가. 이 경우에는 정신적 주체가 그 사건이 일어난 지속의 한 부분으로 스스로를 되돌려야 한다. 그런데 이 역시 불가능해보인다. 지속 속에서의 내용이란 정신의 정념에 의해 선택적으로 드러나지 않기 때문이다. 만일 그런 것이 가능하다면, 우리는 마음대로 이 시간 저 시간을 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러한 봄은 인식적 가치가 있다고 여겨지지 않는다.

인식에 관한 두 존재론적 가능성에 있어, 주체는 어떤 경우에도 “바로 그 야기된 것”을 재현할 수 없다. 하나의 사건에 고유한 특정한 시공간적 점은 정말로 그것에 고유한 것이어서 반복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갖는 형이상학적 토대가 이렇다면, 따라서 사건의 재현은 형이상학적으로 불가능할 것이다.

(“잡담”의 많은 글들이 그렇듯 이 메모 역시 조잡한 상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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