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가지

  • 이른바 “오지랖”이라는 것에 이물감을 크게 느끼는 요즈음이다. 직접적으로 드러난 것은 D의 여러 말들에 대한 과민한 반응이었다. 사실 그것이 유일한 징후이거나, 또는 원인이었던 것은 아니었을 터이다. 나는 자주 그런 간섭에 지쳐했고, A에 대해서도, 나의 경계를 넘어서는 듯한 그런 관심에는 쉽게 불편함을 느꼈다. 조금 달라졌는가 하는 시간이 있었는데, 다시 생각해보니 전혀 그렇지 않다.
  • 업계(?) 특성상 사람의 생사에 관해 고민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나는 무언가를 말해야 할지 여전히 고민이다. 사후세계를 믿지 않으며, 누군가가 죽었을 때 전하곤 하는 “상식적인” 위로가 대체 무슨 위로를 주는지 알지 못한다. 그리움은 죽은 뒤보다 한참 뒤에야 왔다. 사망 소식 직후의 슬픔을 느낀 적이 많지 않다.
  • K(지금은 이렇게 부르는 것이 마땅하다)에게 실례를 저지른 모양이다. 여튼 나는 이 점에 대해는 크게 쓸 것은 없는 듯하다.
  • 도무지 장을 치르는 이들에게 진심어린 위로를 줄 수가 없다. 내가 그와 망자의 사이에 대해 많이 들었다면 모를까, 그런 해당사항이 없는 유족에게 무슨 말을 한다는 것은 진심이 될 수가 없다. 종교적 애도에 대해서는 더 하다. 도무지 “천국 가셨을 겁니다”라거나 “명복(대체 이게 무슨 뜻인가?)을 기원합니다”와 같은 말을 할 생각이 들질 않는다.
  • 그저 관습에 따라가는 것이 상식적인 한 방법이다. 이른바 “사회인”이 된다는 것이 곧 그 방법을 따른다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것을 따를 생각도 좀처럼 들지 않는다. 허위의 말로 관계를 잇기보다는 나의 마음에 있는 만큼을, 더도 덜도 말고 말하고 마는 정도가 아직의 나에게 딱 맞는다.
  • D철학을 혐오하고 B철학을 따른다. 그러나 이러한 나의 신념 내지 감상을 밝히지 않는 것이 하나의 룰이다. 그럼에도 나의 말 한 마디들에서 그 근저에 있는 감상은 낱낱이 드러날 일이다.
  • 진심어린 것이든 아니든 위로가 위로가 안된다는 생각. 적어도 나에게 진심어린 듯 위로한 이나, 내가 위로하지 않아 분노한 이들 중 나에게 “위로감”을 준 자는 한 명도 없었다는 것.

시덥잖은 이야기이므로 일상이다.

댓글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