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어떻게-왜

대학원 신입생 강독회를 위해 강독 도서인 지도교수의 대표작을 읽는다. 서문의 내용은 그가 여느 수업에서도 처음부터 깔고 들어가는 이야기와 동일하다. 분석철학을 하겠다는 입장에서는 머쓱한 소리일 수 있지만, 그의 철학적 전제는 대학에 들어왔을 당시에도, 또한 지금도 아주 그럴듯한 틀을 제공한다.

그의 전제는 철학적 질문의 구획이 무엇-어떻게-왜, 그리고 그 왜에 대해 병렬적인 질문 구조로서 누가-언제/어디서의 틀 아래에 짜여진다는 것이다. ‘무엇’ 질문은 주제에 관한 것이다. ‘어떻게’ 질문은 주제를 대상화한 뒤, 그 대상에 어떻게 접근해야 하는지에 관한 것이다. ‘왜’ 질문은 어떤 주제에 관한 정당화 이유를 묻는 것이다. 그런데 정당화 이유를 물을 때에는 그 정당화가 언제나 어떤 맥락 속의 정당화라는 점에서, 누가/언제/어디서의 지표적 질문이 요구된다.

대륙철학, 특히 독일 철학 전통에 주목하는 그에게 각 질문은 진리 이론의 측면에서 이렇게 나타난다. (진리 이론에 한정하는 이유는, 그가 철학적 질문의 본질은 진리 질문에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무엇 질문은 진리의 본성에 관한 질문이다. 진리는 있는 것에 관한 진리이다. 한편 보편자 “있음”에 대한 정의는 “없지 않음”이라는 부정적 방식으로만 가능하다. 이는 있음에 관한 규정이 본질적으로 무규정적임을 함축한다. 따라서 어떤 것이 있다는 것은, 어떤 것이 참이라는 것을 단지 진술 분석을 통해서만 발견할 수 없음을 함축한다.

일단 등장하는 어떻게-질문은 분석 대상에 대한 우리의 지각 능력을 묻는다. 어떻게 우리는 그 대상을 분석하는가? 어떤 과정에서 어떤 대상이 분석되는가? 이는 근대철학의 대표적 문제의식이다. 다시 말해 인간학적 전회, 인식론적 전회에 해당하는 것이 ‘어떻게’-질문으로의 전회이다. 그런데 이 질문은 단순히 우리가 참을 발견하는 방식의 기술에 불과하다. 메타 탐구로서 철학은 왜 우리가 그렇게 참을 발견하는지를 또한 설명해야 한다. (말하자면 그가 말하는 어떻게-질문은 인식론적 문제 제기의 영역인 듯하다.)

그래서 왜-질문이 등장한다. 그가 찾기로, 왜 질문에 대한 현대 철학의 응답은 삶의 조건이었다. (서문에서는 나오지 않으나 수업에서 말하기로,) 현상학적 전회와 언어분석적 전회가 모두 이러한 ‘조건’의 강조에서 등장한다. 현상학적 전회는 어떤 것을 참으로 만드는 계기가 죽음과 얽혀 수수께끼인 삶에 있다는 것이다. 언어분석적 전회는 모든 참이 단지 언술적으로 참이거나 실증적으로 참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 왜 질문의 답은 이렇게 모호하게 끝날 수는 없다. 그 수수께끼, 언술, 실증적 관찰을 누가/언제/어디서 하는지를 알아야만 이 “왜”가 어떤 “왜”인지 알 수 있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그가 말하는 왜-질문은 인식론적 정당화, 특히 사회인식론이나 덕 인식론이 말하는 정당화의 영역이다.)

그의 철학적 틀에서 언제나 이 여섯 의문사는 꼬리를 물며 등장한다. 일단 그는 논리주의적 기획을 철저히 비난하며 언어적 전환이 고전철학의 기획을 부활시키려는 우상적 기획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꼭 그렇지도 않다. 영미분석철학의 흐름 역시 그가 제기하는 문제의식을 유사하게 갖고 발전해 왔다. 그래서 분석철학을 공부하면서도 그의 철학적 잠언을 주목할 수 있었다.

Read more

진리확정자 그리고 두 종류의 현실주의

가브리엘 콘테사는 이 논문에서 양상 현실주의를 '순한맛'(softcore) 현실주의와 '매운맛'(hardcore) 현실주의로 구별한다. 전자는 스톨네이커로 대표되는 전통적 현실주의이고, 후자는 성향주의로 대표되는 새로운 현실주의이다. 저자는 후자에 대해 제기되는 문제에 대응하고 전자에 대해 새로운 문제를 제기하며 매운맛 현실주의를 옹호하고자 시도한다.

변화들: 다시 여는 말

블로그에 몇 가지 변화를 줬다. 1. 주소를 바꿨다(https://philtoday.kr). 보다 오랫동안 사용하고, 뉴스레터와 연계하기 위해 오래 전부터 계획하던 생각이다. 이에 맞추어 외부용 메일(wj@)과 뉴스레터용 메일(newsletter@) 역시 본격적으로 사용할 예정이다. 명함에 반영해야지. 2. 블로그 이름도 바꿨다. “백야”를 버리고 “오늘의 철학”으로 왔다. 사적인 공간의 이름이었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