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신학과 교회교의학

문화신학을 해야 하는가, 교회교의학을 해야 하는가? 두 신학적 위치는 일견 상반된 듯 보인다. 그러나 그것이 정말로 모순되는 두 후보인지는 재고해 보아야 할 문제이다. 교회신학으로서 신학이 교회 공동체의 언어를 본다면, 문화신학으로서의 신학은 교회가 자기 언어로 지시하는 초월성 자체와 세계의 관계를 보기 때문이다.

전자는 교회와 세계의 대화에 기여하지 못하는 반면, 교회 언어에서 요청되는 형이상학적 원리를 발견하는 데에 기여한다. 후자는 교회 언어의 성찰에 기여하지 못하는 반면, 교회와 세계의 대화에 기여한다. (그 실제에 있어서는 어느 정도 서로를 포함하겠지만)

그렇다면 차라리, 전자는 종교적 철학에, 후자는 철학적 신학에 가깝다. 틸리히가 제기하는 문화신학의 이념은 세계 일반의 초월적 문제를(나는 “메타문제”라는 표현을 선호하지만) 다룬다는 점에서 철학이다. 그러나 그것을 다룰 때 기독교의 관점에서 다룬다는 점에서 종교적이다.

린드벡이 제기하는 언어적 신학의 이념은 언어 활동 이면에 상정되는 초월적 존재자를 규명한다는 점에서 철학적이다. 그러나 그 언어 활동이 특정 종교의 언어로 축소되었다는 점에서 신학이다. 아주 세부적인 특정 범위에 모집단을 한정한 연구가 인간 일반에 대한 규명이 될 수 없듯 그의 신학은 철학이 될 수 없다.

예컨대 헤겔의 철학적 저술은 종교적 철학에 가깝고, 칸트의 이성종교론은 철학적 종교학에 가깝다. 예수가 지도자적 비평가였다면 바울은 비평가적 지도자였다. 중세철학이 철학적 신학에 가깝다면 근대철학은 신학적 철학에 가깝다. 플란팅가가 신학적 철학을 했다면 분석신학자들은 철학적 신학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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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확정자 그리고 두 종류의 현실주의

가브리엘 콘테사는 이 논문에서 양상 현실주의를 '순한맛'(softcore) 현실주의와 '매운맛'(hardcore) 현실주의로 구별한다. 전자는 스톨네이커로 대표되는 전통적 현실주의이고, 후자는 성향주의로 대표되는 새로운 현실주의이다. 저자는 후자에 대해 제기되는 문제에 대응하고 전자에 대해 새로운 문제를 제기하며 매운맛 현실주의를 옹호하고자 시도한다.

변화들: 다시 여는 말

블로그에 몇 가지 변화를 줬다. 1. 주소를 바꿨다(https://philtoday.kr). 보다 오랫동안 사용하고, 뉴스레터와 연계하기 위해 오래 전부터 계획하던 생각이다. 이에 맞추어 외부용 메일(wj@)과 뉴스레터용 메일(newsletter@) 역시 본격적으로 사용할 예정이다. 명함에 반영해야지. 2. 블로그 이름도 바꿨다. “백야”를 버리고 “오늘의 철학”으로 왔다. 사적인 공간의 이름이었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