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칙

오랜만에 풍경 선생님의 블로그에 글이 자주 올라온다. 피드에 구독해 두었기에 매번 알 수 있다. 비트겐슈타인에 관한 글이 공유되어 오랜만에 <철학적 탐구>를 펴 보았다.

W가 이렇게 말한다: “그러나 “y=x^2은 주어진 x에 대해 y를 결정하는 공식인가?”라는 물음으로써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는 즉시 명료하지 않다.” 과연 명료하지 않은 것일까, x가 y에 관해 모종의 일관된 상관관계에 있다고 믿을 때 우리는 y=f(x)라고 표현한다. 이는 현재 일어나지 않은 어떤 사건을 설명할 일관된 법칙이 있음을 의미한다. X={x: 책의 두께} Y={y: 지루함}이라면 아직 일어나지 않은 책-지루함 사건도 f(x)를 따를 것이다. 즉 x와 y가 공식화된 관계를 실현한다면 둘은 일관된 방식으로 관계맺는다.

하지만 <탐구> 186-19?번에서의 비트겐슈타인 또한 그럴듯한 사고실험을 하고 있다. 이것이 그럴듯한 이유는, Y와 X에 각각 대응되는 현실의 사례가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귀납의 과정은 어떤 법칙적 설명을 배제하고, 어떤 법칙적 설명을 수정한다. 반면 186에 제시된 사고실험의 경우 F: X→Y는 선생에게 내면적으로 있고, f(x1), f(x2), … , f(x1000)=f'(x1), f'(x2), … , f'(x1000)인 F’={y=f'(x)}가 학생에게 주어져 있다. 따라서 현실의 사례가 둘 뿐이다. 둘 중 어느 F가 x와 y에 관한 설명인가?

어느 것에 관한 설명도 아니라고 하는 것이 낫다. 문제는 두 함수(사상이라는 표현이 맞는 건가) F와 F’가 말하는 x와 y가 동일하지 않다는 데에 있다. 말하자면, 두 함수가 동시에 기술될 적엔 둘 중 하나의 x, y를 w, z로 바꾸어 기술해야 한다. 그래서 비트겐슈타인의 이 문제는 법칙이 무상하다거나의 문제가 아닌, 어떤 법칙을 말하며 의미하는 바에 관한 차이를 말하는, 의미론적 문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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