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들

  • 크래머의 “해석학 비판: 해석철학과 실재론”을 읽는다. 독일 철학과 프랑스 철학을 주로 잇대는 우리의 경향에는 의아하게도, 그는 콰인과 로티, 데이빗슨과 퍼트남, 그리고 굿맨을 먼저 언급한다. 해석이라는 측면에서 적어도 앵글로색슨과 게르만, 로망스가 한 데 얽힌다.
  • 해석이라는 주제, 특히 해석의 다원성으로부터 나오는 존재/인식적 상대론에 대한 문제는 세 이질적 철학에서 공통적이다. 그러나 세 철학은 하나가 될 수는 없어 보인다. 각 철학이 뿌리내리는 근거가 다른 탓이다. 영미철학은 프레게와 러셀, 콰인에게 근거한다. 독일철학은 훗설과 하이데거, 가다머에게 근거한다. 프랑스 철학은 소쉬르와 베르그손, 라캉에게 근거한다. 각 문화가 조금씩 공유하는 지평은 있으나(동시에 도버 해협 사이에는 직접적 연관이 없지만) 결정적으로 셋은 다른 체계이다.
  • 그러나 국내의 전공자 논문에서는 이러한 접합은 잘 드러나지 않는 듯하다. 기껏해야 프랑스 철학에 뿌리내린 사람이 하이데거나 훗설의 글을 참조한다. 신학자는 프랑스와 독일의 철학에 많은 빚을 진다. 영미철학자는 (몇 예외를 제외하면) 유럽 철학자들의 글을 크게 다루지 않는다.
  • 그렇다고 한국 철학과 그 철학들의 접점을 찾는가? 그렇지도 않다. 기껏해야 “~에서도 ~가 발견된다”라는 국뽕 가득한 참조이다. (풍경 선생의 시도들은 여기에서 예외이다.)
  • 나는 어디에 뿌리내리는가. 자유교양은 프랑스 철학과 마르크시즘에, 연세신학은 독일과 프랑스에, 나 개인은 앵글로색슨(-오스트레일리안)에 뿌리를 갖는다. 그렇다보니 나오는 결과물도 짬뽕이다. 언젠가는 이것을 내 강점으로 여겼다. 그런데 지금은 다소 복잡해졌다. 국내에서 접할 주제를 찾지 못하겠는 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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