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건이 아닌 사태를 표상함

우리가 표상하는 것이 하나의 사건이 될 수 없다. 모든 사건은 그것의 고유한 시간과 공간 안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사건을 우리가 재현한다는 것은,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그 시기로 돌아가거나, 특정한 매체를 통해 바로 그 고유성을 반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재현은 불가능하다. 적어도 물리적으로 그렇다. (나는 또한 형이상학적으로도 그것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우리는 그 사건과 결부된 어떠한 사태를 표상한다. “세월호”라는 이름을 통해 사슬을 형성하는 어떠한 사건이 있다. 그 사건을 기억한다는 것은, 바로 그것에 우리가 결부하는 어떠한 사태를 표상한다는 것이다. 이 표상이 어떤 방식으로 일어나는지는 고정되지 않는다. 어떤 사태가 표상될지는 그것을 표상하는 공동체에 따라 상대적일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즉 기억은 맥락 의존적인 표상이다.

누군가는 아주 일반화된 사고로서, 모든 수운 사고에 세월호를 결부할 수도 있다. 이 때 세월호에 있는 여러 주관적 의미는 희석될 것이다. 이렇게 고찰되는 세월호는 그저 “모종의 일로 침몰한 모종의 배”로 남을 것이다. (물론 어떠한 이름이 바로 그 대상에게 주는 구별짓기의 효과를 생각할 때, 이러한 방식의 사고는 합리적이지 않다고밖에 생각될 수 없다. 그럼에도 그런 사람들은 정말로 있다.)

또 누군가는 단칭적인 사고로서, 이러저러한 바로 그 배의 사고로 세월호를 결부할 수 있다. 이 때는 주관적 의미가 희석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단 하나의 의미로 그 주관성이 고정되지는 않는다. 어떤 주관적 맥락으로 해석할지 자체가 특정한 맥락에 의존되는 표상으로 그 결부함을 특정할 것이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세월호 사건을 국가의 실책으로 커진 사건들 중 하나와 결부하며 사고할 수 있다. 이 때 고정된 맥락은 국가의 사고 대처를 비판하기 위해 사용된다. 즉 세월호는 국가의 안전 보장 의무 위반에 대한 상징이다. 세월호에 대한 기억은 국가의 안일한 대처와 떨어져서 이루어질 수 없다. 이렇게 고찰될 때 세월호를 말한다는 것은 국가의 안전 보장 의무를 역설하는 것을 의미한다.

다른 누군가는 세월호 탑승자들을 바로 그 탑승자들의 가족이나 친구, 동료를 통해 맥락적으로 고정할 수 있다. 그리고 그러한 고정을 하는 이의 의도는, 대부분 바로 그 친밀한 이들과 자신을 동일시하려는 것이다. 이 때 세월호는 “친밀한 사람이 그 이유를 알 수 없게 희생당한 일”로 기억된다. (물론 이 기억의 주체는 실제 그 가족이나 친구, 동료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러한 기억 방식은 그들에 대해 느끼는 비통함이라는, 특정한 애도 방식을 낳는다.

또 다른 누군가는 세월호 탑승자들의 죽음을 인간의 죽음 일반과 맥락적으로 결부할 수 있다. 이 때 세월호는 죽음으로 상징되는, 이른바 “부조리한 악의 경험” 일반을 상징하게 된다. 세월호란 도대체 정의롭다고 할 수 없는 악의 사건이 현현한 그러한 것으로 기억되는 것이다. 이 때엔 상당히 형이상학적인 한탄과, 그 때의 일반화된 윤리적 태도를 말하는 것으로 사고가 이어진다.

이 중 어떤 사고 방식이 세월호에 관한 참된 사고인가? 이 질문은 사실 옳지 않다. 사고되는 것은 세월호 그 자체가 아니라, 그 세월호라는 이름으로 표상되는 어떤 다른 대상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세월호 또한 바로 그 대상으로 표상될 수는 있겠지만, 그 배의 형이상학적 본질이 무엇인지에 관한 인식론적 정당화 방식은 우리에게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다보니 우리가 생각하는 바로 그 배의 존재 양식에 따라 그것과 결부한 나름의 기억 내지 애도를 하게 된다.

따라서 고쳐진 질문은, “어떻게 세월호를 기억하는 것이 더 윤리적인가?”이다. 나는 여기에서 물어지는 “더 윤리적”인 방식은 다름 아니라 칸트의 “간접 의무”에 해당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어떻게 세월호를 기억하는 것이 우리를 더 윤리적인 주체들로 고양시키는지, 이것이 중요하다. 만일 우리가 세월호를 수많은 수운 사고 중 하나로 여긴다면, 우리는 그것을 표본 삼아 모든 수운 사고를 무덤덤히 볼 것이다. 애도하지 않음은 윤리적이지 않다. 고로 이러한 방식은 지양되어야 한다. … 이런 식으로 다른 방식들 역시 검토된다.

물론 어떤 경우에도 세월호 그 자체와 우리의 세월호에 관한 사고가 동일시될 수 없으며, 이를 항상 숙지하고 있는 것이 맞는 처사일 터이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우리가 생각한 “세월호됨”을 다른 이에게도 세월호의 본질로 여기길 강요하게 될 것이며, 무엇보다 바로 그 사건에 의해 현실적인 역경을 겪은 이들에 대한 폭력을 낳을 것이다. 심지어 우리는 이러한 점을 잊을 때 “진실”이라는 곳에도 다가갈 수 없다.

(이렇게 고찰하는 세월호는, 우상화된 것의 표본으로 다루어지는 셈이다. 우리는 어떤 것, 예컨대 그리스도라든지 떨기나무, “최초의 인간” 등을 우상화하며, 그것이 우리에게 의미하는 바를 그것이 최초에 지시했던 바로 그 대상과 동일시하려 드는 경향이 있다. 그러한 동일시에서 우리가 얻을 것은 별로 없고 잃을 것은 많다. 더구나 그 동일시를 통해 이 세계에 정말로 벌어진, 그 사건과 인과적 매개를 갖는 사건들의 의미를 축소하게 되는 경우들이 많다. 그러한 축소를 하지 않는 것이 진리와 윤리에 관한 바른 태도라는 것이 하나의 단상⎯물론 논증이라고 할 수는 없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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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확정자 그리고 두 종류의 현실주의

가브리엘 콘테사는 이 논문에서 양상 현실주의를 '순한맛'(softcore) 현실주의와 '매운맛'(hardcore) 현실주의로 구별한다. 전자는 스톨네이커로 대표되는 전통적 현실주의이고, 후자는 성향주의로 대표되는 새로운 현실주의이다. 저자는 후자에 대해 제기되는 문제에 대응하고 전자에 대해 새로운 문제를 제기하며 매운맛 현실주의를 옹호하고자 시도한다.

변화들: 다시 여는 말

블로그에 몇 가지 변화를 줬다. 1. 주소를 바꿨다(https://philtoday.kr). 보다 오랫동안 사용하고, 뉴스레터와 연계하기 위해 오래 전부터 계획하던 생각이다. 이에 맞추어 외부용 메일(wj@)과 뉴스레터용 메일(newsletter@) 역시 본격적으로 사용할 예정이다. 명함에 반영해야지. 2. 블로그 이름도 바꿨다. “백야”를 버리고 “오늘의 철학”으로 왔다. 사적인 공간의 이름이었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