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강림 혹은 부활

  • 성령강림주일을 맞는다. 동시에 이한열의 죽음을 맞는다. 동시에 동료 친지의 부고를 맞는다.
  • 성령의 강림과 성도의 죽음은 어떠한 관계도 없어보인다. 그러나 실상 그 둘의 관계는 어떤 것보다 긴밀하다. 성령 강림 사건은 예수의 죽음 후에야 찾아왔다. 단지 시간 상으로만 이후인 것이 아니다. 예수의 죽음을 애도하는 바로 그 때 사건이 일어난다.
  • 성령 강림의 사건은 예수의 죽음에 대해 어떤 영향을 끼쳤는가? 지체들은 형제된 예수의 죽음이 그의 형상이 소멸되었음을 의미하지 않고, 오히려 그가 지체 가운데에서 부활했음을 본격적으로 확신하기 시작한다.
  • 복음서 사가들, 특히 누가의 증언에 따라서만 생각하자면 성령은 사도들이 젊을 적 강림했으며 예수는 죽자마자 형상을 질료 속에 실현해 제자들에게 나타났다.
  • 그러나 마가의 두 종결은 이러한 증언이 역사적 사실이냐는 데에 의심을 갖게끔 한다. 마가의 짧은 종결은 제자들이 예수의 무덤에 갔더니 그의 몸이 없더라는 열린 결말이다. 반면 긴 종결은 우리가 익히 아는, 그의 부활 사건을 증거한다.
  • 만일 복음서의 부활에 관한 증언과 누가의 성령에 관한 증언이 역사적 사실이라면 이 두 종결은 이해하기 쉽지 않다. 성령 강림이나 예수의 실체적 부활에 의해 그의 부활이 확증되었음에도 짧은 종결을 택한 공동체는 그의 부활을 복음으로 전하지 않았다는 역설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 따라서 예수의 부활은 차라리 성령 사건 이후, 과거의 경험을 신앙적 사건으로 회고하면서 발견된 바라고 보는 것이 옳지 않은가? 도마의 극적인 회심은 오히려 그러한 회고 과정에 추가된 모종의 구성된 서사 아닌가?
  • 이렇게 생각할 때, 성령의 강림은 단지 예수에 대한 애도와 우연적 연접을 갖는 것이 아니다. 성령의 강림은 오히려 예수에 대한 애도가 그친 사건과 동일한 사건에 해당한다.
  • 성령은 모든 삶의 정황 속에서 의미를 발견하게 한다. 그 의미의 발견을 통해 우리는 죽음을 우리의 슬픔과 동일시하지 않게 된다. 이어지는 것은 우리 가운데에 넘치는 생명이다. 그 생명을 통해 죽은 이의 형상을 실현한다. 영생은 그런 식으로 이어지는 생의 흐름일 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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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확정자 그리고 두 종류의 현실주의

가브리엘 콘테사는 이 논문에서 양상 현실주의를 '순한맛'(softcore) 현실주의와 '매운맛'(hardcore) 현실주의로 구별한다. 전자는 스톨네이커로 대표되는 전통적 현실주의이고, 후자는 성향주의로 대표되는 새로운 현실주의이다. 저자는 후자에 대해 제기되는 문제에 대응하고 전자에 대해 새로운 문제를 제기하며 매운맛 현실주의를 옹호하고자 시도한다.

변화들: 다시 여는 말

블로그에 몇 가지 변화를 줬다. 1. 주소를 바꿨다(https://philtoday.kr). 보다 오랫동안 사용하고, 뉴스레터와 연계하기 위해 오래 전부터 계획하던 생각이다. 이에 맞추어 외부용 메일(wj@)과 뉴스레터용 메일(newsletter@) 역시 본격적으로 사용할 예정이다. 명함에 반영해야지. 2. 블로그 이름도 바꿨다. “백야”를 버리고 “오늘의 철학”으로 왔다. 사적인 공간의 이름이었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