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의 역학 (1)

신앙의 역학 (1)
  1. 신성은 무조건성, 즉 궁극성에 기초한다. (*여기에서 “궁극성”이란, 그 이상의 원인 내지 근거를 찾을 수 없다는 의미일 것이다.)
  2. 무조건성, 즉 궁극성, 즉 무제한성, 즉 절대성은 객관과 주관의 경계를 말소시킨다. 이러한 성격의 존재자에 대해서는 그 인식 내용이 실재적으로 담지하는 속성과 동일하기 때문이다.
  3. 무제한성을 주장하지만 실제로 제한적인 것(아마도 특정 종교공동체의 하느님 인식 등을 의미하는 듯하다)은 객관과 주관의 경계를 말소시키지 못한다. 그것은 실재적 존립과 인식 내용에 차이를 갖기 때문이다.
  4. 신앙은 (그것이 신성에 관한 신앙이라는 의미에서) 무조건적인 것에 관한 지향성이다. 따라서 신앙은 민족이나 부 등에 관한 의식과 동질적이지 않다.

1은 사실 신성이 무엇인지에 관해서는 별 말을 하지 않는 논제이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신성이란 “신의 본질” 또는 “신의 독특한 특성” 정도로 정의될 수 있을 것인데, 이 복합개념을 구성하는 “신” 자체가 일종의 원초적 개념으로 놓여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1은 정의하는 논제가 아니라 설명하는, 또는 고백하는 논제이다. 즉 “우리가 어떤 것을 신의 독특함이라고 부를 때, 이는 그것이 어떤 근거에도 기초하지 않는다는 데에서 비롯한다.”

신앙이란 어떤 것에 관한 신앙이라는 점에서 언제나 지향적 태도를 내포한다. (어떤 대상에 관한 태도도 아닌 상태를 두고 신앙이라고 부르는 것은 합법적인 언어 사용이 아니다.) 따라서 1을 고백하는 이에게 4의 전건이 참일 것이다. 그런데 이로부터 4의 후건이 나오기 위해서는 민족이나 부 등에 관한 의식이 신에게로 향한 의식과 필연적으로 이질적임을 보여야 한다. 2와 3은 이를 위한 보조정리이다.

2와 3의 전제는 <궁극성 iff 인식론적-형이상학적 경계 말소>라는 조건문이다. 틸리히는 2와 3으로부터 제한성과 무제한성이 이질적임을 보여야 하는데, 숨겨진 전제가 한 방향으로의 조건문이라면 그것의 이질성이 귀결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숨겨진 전제에 의해 궁극성과 주-객 경계 말소는 필요충분조건 관계이다. (또는, 투명한 문맥에서는 언제나 교차 사용이 가능하기도 할 것이다.)

왜 민족정신에서가 아니라 신성에서만 주객의 경계가 말소되는가? 우선, 민족정신으로부터는 주객의 경계가 말소되지 않는다. 민족적 세계관 Wn에서 참으로 여겨지는 p를 믿는다고 할 때, 세계관 내에서 p의 정당화 근거가 총체적인 세계에 있지만 세계관 밖에서는 Wn라는 제한된 영역 내에서의 정당화 근거로만 발견된다. 즉, 조건적이다. 따라서 주관적인 방향과 객관적인 방향에서 정당화 근거가 서로 다르다. 반면 신성은 정의상 그럴 수 없다. 신성은 무조건적인 것(칸트 식으로는 “범주적categorical”인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신성은 주객을 말소시킨다. 숨겨진 전제에 의해, 민족정신과 신성은 서로 이질적인 신앙을 얻는다.

틸리히의 논증은 안셀름의 신 존재 이해를 따라가는 듯 보인다. 신적 간섭이 지상 공동체의 그것과 구분되는 근거는, 지상 공동체는 그것을 상대화시키는 외부적 맥락이 있는 반면 신성에는 그러한 맥락이 없기 때문이다. 안셀름이 존재론적 추론으로부터 발견한 신성은 이와 마찬가지로 바깥이 없는 신성이었다. 또한 그의 신성은 스피노자의 그것과도 닮았다. 스피노자에게 있어 신이란 속성을 담지하는 가장 큰 단위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렇게 고찰된 신은 전혀 호교론적이지 않아 보인다. 어떤 종교가 고백하는 신-담론이란 언제나 서사에 구속되어 있다. 서사에 구속되어 있기에 종교의 신은 공동체 내재적이다. 신성은 그러한 공동체 밖에 있다. 따라서 하나의 종교의 고백 자체는 민족주의나 금권주의의 그것과 크게 이질적이지 않다. 차이가 있다면 종교는 그 너머의 신성을 추구한다는 것이겠지만, 민족주의나 금권주의 역시 그 너머의 무한을 추구하는 유한적 체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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