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의 역학 (2)

신앙의 역학 (2)
  1. 어떤 이들은 신앙을 인식론적 행위라고 주장한다. 즉, 신앙은 일종의 믿음 태도로서 신에 관한 명제적 지식을 대상으로 한다.
  2. 충분한 권위를 가진 증언에 의한 것이 아니라면, 직접 경험의 대상에 관해서만 믿음을 갖는 것이 정당화된다.
  3. 신앙은 직접 경험에 의해 정당화되지 않는다. 따라서 신앙이 인식론적 행위라면, 그것은 권위를 가진 증언에 의해 획득된 믿음에 관한 태도이다.
  4. 그런데 권위 있는 증언에 의한 믿음태도는 무조건적이지 않다. 반면 신앙은 무조건적이다.
  5. 따라서 신앙은 단순히 인식론적 행위로 소급될 수 없다.

이는 신앙이 믿음 태도나 권위에 대한 신뢰를 포함하지 않는다는 논증이 아니다. 신앙의 양태가 그러한 신뢰나 태도로 나타날 수는 있지만, 신앙의 근거 내지 본질이 인식론적인 데에 있지는 않다는 논증이다.

논증에서 의심스러운 부분은 (2)이다. 이 논제는 모든 지식이 증언에 의한 것이거나 경험에 의한 것임을 선제한다. 그러나 과연 그러한가? 틸리히는 (2)를 통해 모든 이론적 지식이 후험적임을 말하는 셈이다. 여기에서 선험적 지식은 어디에 있는가?

우리는 선험적 지식을 특정한 증언이나 경험에 의하지 않고 정당화한다. 어떤 경험들을 통해 그 지식을 발견하거나, 어떤 증언을 통해 그 지식을 배우기는 하지만 지식의 내용 자체는 선험적이다. 수학이나 문법, 형이상학적 진리가 그러한 지식의 대상이 된다.

신앙, 즉 무조건적 존재자에 관한 관심도 마찬가지이다. 또는, 앞선 진리는 신앙의 대상이다. 왜냐하면, 선험적 진리 중 일부는 경험의 조건이 되기 때문이다. 경험의 조건이 아닌 선험적 진리는 행위의 기준이 되기도 한다. 신앙은 전자와 후자에 모두 관련될 것이다.

한편 같은 절에서의 언급들을 볼 때 틸리히가 염두에 둔 것은 지식 일반이 아닌 “과학적 지식” 또는 “이론적 지식”에 한정된 것일지도 모른다. 이는 경험되는 사실에 관한 지식을 의미하는 것일 터이다.

그렇게 한정한다면 그가 말하는 “거룩한 권위”라는 것은 결국 공동체의 권위 내지 선험적 사실에 요청되는 그러한 권위로 소급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생각할 때, 틸리히에게 신앙은 선험적 사실에 관한 실존적 결단에 관련된다. 다음 언급은 이러한 점을 뒷받침한다:

The other complete evidence is that of logical and mathematical rules which are presupposed even if their formulation admits different and sometimes conflicting methods. One cannot discuss logic without presupposing those implicit rules which make the discussion meaningful. …

Dynamics of Faith(Tillich, Paul), “What Faith Is Not”(p. 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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