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ewcommand{\sslash}{\mathbin{/\mkern-6m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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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command{\Dashv}{\mathbin{\style{display: inline-block; transform: scaleX(-1)}{\vDash}}}$$
- 예컨대 무의미한 것은 이런 것을 두고 벌어지는 논쟁이다. “하느님은 한 분이신가?” “예수께서 부활하였는가?” “육신에 매인 자가 구원받아 있는가?”
- 그 이유는, 종교의 언어는 두 겹 층위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보헨스키는 이를 <종교 논리학>으로 정식화하고자 했다.) 표면적으로 종교의 언어는 세계의 어떤 대상에게도 관여하지 않는다. 그 언어가 담지하는 은유에 해석이 부과될 때에만 언어는 세계에 관여한다.
- 성서나 공동체의 고백을 통해 하느님의 유일성이나 구원의 범위 등은 확정될 수 있다. 그러나 그 확정은 허구 안에서의 확정이다. 은유에 대한 해석이 이루어져야만 실재하는 대상들에 관여하는 명제로 기능할 수 있기 때문이다.
- 따라서 (좁은 의미에서, 성서의 내용만을 갖고 꾸려지는) 교리적 논쟁은 매우 공허하며 좀처럼 바뀌기 어려운 진리에 관한 것이다. 또는 아주 쉽게 참 거짓이 판단 가능한 지식에 관한 논쟁이다.
- 정말 어려운 논쟁은 해석의 문제이다. 하느님이 지시하는 바가 무엇인가? 세계인가, 원리인가, 창조성인가, 창조자인가? 육신이란 무엇인가? 물리세계인가, 퇴락성인가, 타자와의 분리됨인가?
- 그리고 그 해석 이후에만 제대로 된 교리적 논쟁이 가능하다. 이러한 논쟁은 교조적인 성서 구절만 반복하지 않는다. 직접 세계의 존재자들을 언급하며, 세계의 언어로 성서를, 성서의 언어로 세계를 재해석한다.
- 신학에서 무의미한 논쟁은 단순히 참거짓의 판단이 불가능한 것을 말하지 않아야 한다. 그것은 가장 참거짓 판단이 쉽지만, 실제로는 그것이 제대로 된 판단이 아니게 되는 그런 논쟁들에 적용되는 말이다. 정말로 진위 판단이 가능한, 세계에 대한 언급들로 채워지는 신학이 의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