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적 무의미

  1. 예컨대 무의미한 것은 이런 것을 두고 벌어지는 논쟁이다. “하느님은 한 분이신가?” “예수께서 부활하였는가?” “육신에 매인 자가 구원받아 있는가?”
  2. 그 이유는, 종교의 언어는 두 겹 층위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보헨스키는 이를 <종교 논리학>으로 정식화하고자 했다.) 표면적으로 종교의 언어는 세계의 어떤 대상에게도 관여하지 않는다. 그 언어가 담지하는 은유에 해석이 부과될 때에만 언어는 세계에 관여한다.
  3. 성서나 공동체의 고백을 통해 하느님의 유일성이나 구원의 범위 등은 확정될 수 있다. 그러나 그 확정은 허구 안에서의 확정이다. 은유에 대한 해석이 이루어져야만 실재하는 대상들에 관여하는 명제로 기능할 수 있기 때문이다.
  4. 따라서 (좁은 의미에서, 성서의 내용만을 갖고 꾸려지는) 교리적 논쟁은 매우 공허하며 좀처럼 바뀌기 어려운 진리에 관한 것이다. 또는 아주 쉽게 참 거짓이 판단 가능한 지식에 관한 논쟁이다.
  5. 정말 어려운 논쟁은 해석의 문제이다. 하느님이 지시하는 바가 무엇인가? 세계인가, 원리인가, 창조성인가, 창조자인가? 육신이란 무엇인가? 물리세계인가, 퇴락성인가, 타자와의 분리됨인가?
  6. 그리고 그 해석 이후에만 제대로 된 교리적 논쟁이 가능하다. 이러한 논쟁은 교조적인 성서 구절만 반복하지 않는다. 직접 세계의 존재자들을 언급하며, 세계의 언어로 성서를, 성서의 언어로 세계를 재해석한다.
  7. 신학에서 무의미한 논쟁은 단순히 참거짓의 판단이 불가능한 것을 말하지 않아야 한다. 그것은 가장 참거짓 판단이 쉽지만, 실제로는 그것이 제대로 된 판단이 아니게 되는 그런 논쟁들에 적용되는 말이다. 정말로 진위 판단이 가능한, 세계에 대한 언급들로 채워지는 신학이 의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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