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재론

오랜만에 지평에 새로운 글을 올렸다: “추상적인 것에 관해 논쟁하기(링크)”. 내가 이 글을 통해 주장하려 했던 바는, 우리는 추상적 개념에 대해서도 그것이 가공의 것이 아닌 실재하는 것이라고 주장할 충분한 근거를 갖는다는 것이다. (또한 그것에 관해 잘 이야기할 수도 있다고 믿는 것에 문제가 없다고 나는 믿는다.) 이는 형이상학적 실재론을 지지한다.

한편 이는 내가 다른 몇 글에서 견지한 내재적 실재론자 관점과 배치되는 듯 보일지도 모른다. 진리는 존재론 의존적이라는 신념은 형이상학적 실재론과 모순되는듯 보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외견이 옳다면, 나는 내적 모순을 갖고 있는 것이며, 따라서 내 연구는 모두 쓰레기통에 들어가는 것이 낫다.

그러나 나는 이러한 모순이 환상이라고 생각한다. 내재적 실재론은 단지 문장의 참과 거짓이 발화시의 논의 영역에 달렸음만을 의미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적어도 하나의 논의 영역 안에서는, 그것이 가정하는 모든 보편자 및 규칙들은, 그 논의 영역의 규칙에 따라 옳게 가정되는 것이라는 말이다. 상당히 사소한 주장이다. 그러나 이 사소함이 도움되는 맥락이 있고, 나는 종교에 대한 철학적 접근에서 특히 그렇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내재적 실재론이 이해될 때 데이빗슨의 반론은 큰 문제가 안 된다. (나는 실제로 데이빗슨적인 관점을 이전의 한 글에서 썼기에 이 역시 문제된다.) 그의 말처럼 논의 영역 밖에 다른 영역이 있다고 간주하는 것은 모든 대화를 이상한 것으로 만든다. 그러나 이는 대화가 가능하기에 그것이 같은 논의 영역을 갖는다는, 아주 사소한 주장이다. 다른 시점의 대화는 다른 논의 영역을 가질 수 있다. (나는 이 글에서 ‘논의 영역’의 원소들이 개체들이 아닌 존재론적 대상이라고 전제하고 있다.)

그런데 이상의 설명은 조금 엉성하다. 형이상학적 실재론과 내재적 실재론이, 또 내재적 실재론과 데이빗슨주의가 각각 정합적이라는 주장은 외견상 어색한데, 이상의 문단은 이 어색함을 잘 해소하지 못한다. 그러나 나는 그것들 모두가 동시에 정합적이라는 직관을 갖고 있다. 그러니 종교철학에서의 여정을 일단락한다면, 나는 이 세 관점의 정합성 주장에 천착할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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