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화사 변이와 기술구주의

양화사 변이의 옹호자에게 있어 문제될 것 중 하나는 단칭어의 문제이다. 학위논문을 쓸 때 비슷한 문제를 다루었기는 했었는데, 테드 사이더의 논문, “Neo-Fregeanism and Quantifier Variance”(Sider 2007)를 읽고 이 문제를 좀 더 진지하게 생각할 수 있었다.

문제란 이런 것이다. 두 언어, L과 M이 있다고 하자. 이 두 언어는 상이한 양화 방식을 갖는다. 가령, L은 대상들의 부분론적 합을 받아들이지 않고 M은 무제약적 합을 받아들인다고 하자. 이제 M에서 “a는 b와 c로 구성되었다”가 참이라고 하자. 이를 L이 어떻게 번역할 수 있는가? 이름 “a”를 이름으로 그대로 옮길 경우, L은 존재 보편화 규칙을 수행함에 따라 M과 같은 양화 방식을 취하는 것으로 붕괴하고 만다.

여기에서 문제되는 것은 둘이다. 서로 다른 두 양화 방식이 하나의 논증에서 사용될 수 있냐는 것이 한편이다. 그리고 이것이 내가 생각기로 제거 규칙과 도입 규칙에 의거한 양화사 변이주의에 대한 반론에서 의도하는 바이다. 그런데 이것 말고도 위의 사례가 명시적으로 보여주는 문제적 상황은, 서로 다른 두 양화 방식을 사용하는 두 언어가 이름을 공유할 수 있냐는 데에 있다.

학위논문에서 내 해답은 대략 다음과 같은 식으로 나왔다. M에 속하는 이름 “a”는 실지로는 번역 함수 F를 통해 F(X, x)가 양화사로 구속된 꼴로 번역된 표현이 L에서 등장하는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b와 c로 구성된 a는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L에서의 진리가 M의 문장을 통해 표현될 때 그 문장에서는 “a”가 등장하는 대신 G(X, x)가 양화사로 구속된 꼴이 등장해야 한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이는 결국 이름에 관한 기술구주의적 입장으로 나아간다. 다만 내가 평소에 옹호하고 있던 일상적 고유명(사)에 관한 기술구주의가 아닌, 보다 급진적인 단칭어 일반에 관한 기술구주의가 된다. 양화사 변이 논제를 방어하기 위해서는 일상적 고유명뿐 아니라 모든 단칭어에 관해 위와 같은 (이름을 기술구로 붕괴시키는) 번역 절차가 옹호되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일단 문제는 이 때 심각한 관념론이 함축되는 것 같다는 점이다. 어떤 언어에 있어서도 거기에서 등장하는 단칭어가 진정한 고유명이 아닌 위장된 기술구로 간주되어야 할 것이기 때문에 그렇다. 적어도, 그것이 진정한 고유명인 경우에도 그 진정성은 ‘제약된’ 진정성이다. 고유명이 진정한 고유명인 것은 어떤 언어 하에서의 사용에서의 불과하다. 진정한 고유명, 그리고 그 고유명을 통해 지칭되는 진정한 개체란 존재하지 않는다.

이에 관한 한가지 해법 중 하나는 양화사 변이 논제 자체를 약화시키는 것일지도 모른다. 가령, 양화사 변이는 언어의 특정 차원에서만 일어난다는 것이다. 나는 이 해법이 퍼트남-케이스의 해법과 결국 같다고 생각한다. 이들에 있어 보다 근원적인 언어, 즉 자연 언어에서는 양화사 변이가 일어나지 않으며, 다만 양화사 변이는 파생적 언어인 선택 언어에서만 일어난다. 이 경우 ‘진정한 고유명’은 자연 언어의 지칭적 장치들 뿐이며, 모든 선택 언어의 단칭어들은 위장된 기술구에 불과해진다.

문제는 이 때 자연 언어의 단칭어와 선택 언어의 단칭어가 갖는 동일성 관계 내지 연속성 관계가 어떻게 이해될 수 있겠냐는 것이다. 그러게.. 그게 어떻게 이해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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