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회의주의

어떤 사건이 신성 체험을 야기한다. 그 사건을 두고 계시라고 부른다. (또는, 어떤 존재자가 신성을 예화하는 사건이 계시이며 그것이 신성 체험을 야기한다.) 심적 표상은 오로지 신성 체험만을 내용으로 갖는다. 그러한 체험은 신성을 담지하거나 예화하지 않는다. 따라서 우리는 신성과 면식 관계를 형성할 수 없다. (여기에는, 합리적 구성을 통해 신성을 개념화할 수 없다는 전제가 숨어있다.)

신성 체험을 신성과 동일시한다. 이를 우상 숭배라고 부른다. 이는 마치 빨간 모자를 보편자 “빨간색임”과 동일시하는 것과 같은 오류이다. 이런 류의 오류는 공동체의 발견을 오염시킨다. 신성의 개념이 이질적인 두 존재자에게 공히 적용되었기 때문이다. 하나의 개념이 두 상이한 개념의 내포를 선언지적으로 지닌다. 그렇다면 신성이 도무지 특정되지가 않는다. 그래서 신성 담론이 건전하지 않아진다.

그런데 종교 공동체는 근본적으로 상징을 근간으로 한다. 최소한 모종의 신학적 개념으로 신과의 유비를 시도한다. 우상숭배의 개념을 고려할 때 이런 상징 역시 우상이다. 유비는 하느님 개념을 오도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종교 공동체에 집착해서는 안된다. 차라리, 나약한 인간 본성을 생각할 때, 종교 공동체에 속하기를 거부하는 것이 낫다.

그러나 여기에서 멈춘다면 우리에게 무슨 이익이 있는가. 모종의 신성 체험이 있다. 그 체험을 공유하며 지평을 넓히고, 그 체험을 설명해 내고자 종교 공동체가 존재한다. 지평을 넓히다보면 우리가 무엇을 해야 마땅한지 알게 될 것이다. 그러다보면 유한자의 실존적 문제에서 해방될 것이다. 그래서 종교 공동체가 존재해야 한다.

허나 그 공동체가 언제나 오도된 하느님 이해만을 한다면 어떻게 하는가. 더 나아가 그것이 단순히 인식 능력의 한계가 아닌 개념적 한계라면 어떻게 하는가. 범주적 한계라면 어떻게 하는가. 여전히 교회 공동체는 존재하는 것이 바람직한가.

이렇게 두 긴장 사이에서 갈팡질팡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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