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해들

종교적이지 않은 종교가 있을 수 있다. 신학적이지 않은 신학이 있을 수 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한가? ~적임, ~성 등은 어떤 것의 전형이 이러저러함을 내포할 뿐이기 때문이다. ‘종교적이지 않은 종교’는 자기모순이 아닌, 파격적 종교라는 의미이다. ‘신학적이지 않은 신학’ 역시 유사한 표현이라고 봄이 맞다.

‘형이상학적 테제’, ‘인식론적 논제’, ‘윤리학적 주장’ 등의 표현에 씌워진 모종의 가치평가적 뉘앙스를 생각해 본다. “형이상학적 실재론은 거부되어야 한다”라는 논제는 철학에서 형이상학이 거부되어야 함을 의미하는가? “칸트의 철학은 근대적인 인식론적 철학이었다”는 칸트가 오로지 지식에 관해서만 분석했음을 의미하는가? “현대 프랑스 철학은 윤리학적 전회를 겪었다”는 프랑스 철학이 실천론에만 개입함을 의미하는가? 어떤 것도 옳지 않다.

그런데 자꾸 사람들이 오해를 한다. 형이상학적 문제들에 관심이 있다고 하면 의심스러운 눈초리를 보내는 사람들이 있다. 신학적 논제들을 주로 다룬다고 하면 내가 전통적 관점을 옹호하는 사람이라고 보이곤 한다. 그럴 때마다 굳이 난 변명을 해야 하는데, 그것이 귀찮으니 차라리 형이상학에 대한 내 흥미를 접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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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확정자 그리고 두 종류의 현실주의

가브리엘 콘테사는 이 논문에서 양상 현실주의를 '순한맛'(softcore) 현실주의와 '매운맛'(hardcore) 현실주의로 구별한다. 전자는 스톨네이커로 대표되는 전통적 현실주의이고, 후자는 성향주의로 대표되는 새로운 현실주의이다. 저자는 후자에 대해 제기되는 문제에 대응하고 전자에 대해 새로운 문제를 제기하며 매운맛 현실주의를 옹호하고자 시도한다.

변화들: 다시 여는 말

블로그에 몇 가지 변화를 줬다. 1. 주소를 바꿨다(https://philtoday.kr). 보다 오랫동안 사용하고, 뉴스레터와 연계하기 위해 오래 전부터 계획하던 생각이다. 이에 맞추어 외부용 메일(wj@)과 뉴스레터용 메일(newsletter@) 역시 본격적으로 사용할 예정이다. 명함에 반영해야지. 2. 블로그 이름도 바꿨다. “백야”를 버리고 “오늘의 철학”으로 왔다. 사적인 공간의 이름이었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