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적 행위자에 대한 (다수) 존재 개입

변화. 개념적 변화라는 현상을 생각할 수 있다. 가령, ‘물’의 개념이 동일한 채 그 외연과 내포가 변화하는 경우를 생각할 수 있다. (개념 공학자들의 사례.) 확률 함수의 변화라는 현상을 생각할 수 있다. 가령, H라는 명제에 관한 나의 신념도 할당이 E라는 또다른 명제가 배경 지식으로 주어짐에 따라 변화해서, P(H|E)=P*(H)이 되는 상황을 생각할 수 있다. (학습에 관한 베이즈적 해명.)

정신 독립성. 개념은 정신 독립적이다. 가령, 나의 주관에서 ‘장미’와 ‘라넌큘러스’가 동일하게 표상되는 경우에도, 각각의 개념은 서로 다른 외연에로 사상된다. (퍼트남의 너도밤나무-참나무 사례.) 합리성은 정신 독립적이다. 가령, 나는 들판 위에 소들이 있는 것을 보았고 이로부터 ‘저 들에 소가 있다’라고 추론했지만, 실지로 내가 본 적은 소 모형이었으며 아주 우연히, 그 모형 뒤에 소 한 마리가 있었음에 따라 내가 인식적 요행을 얻어냈을 뿐인 상황을 생각할 수 있다. (게티어 사례.)

불일치. 개념 상대성이라는 현상을 생각할 수 있다. 가령, 같은 사실들이 주어졌을 때 ‘존재’의 개념이 적용되는 것이 셋이라고 주장하는 이와 일곱이라고 주장하는 이가, 완벽히 그 개념 체계에 능숙할 때에도 발생하는 경우를 생각할 수 있다. (퍼트남의 개념 상대성 사례.) 합리적 불일치라는 현상을 생각할 수 있다. 가령, 두 사람이, 전적으로 합리적인 추론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H에 대한 신념도를 p와 1-p로 갖는 상황을 생각할 수 있다. (합리적 불일치 사례.)

(위의 세 사례는 적절한 변형을 통해 언어철학적, 윤리학적 영역에서도 발견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변화 현상은 (언어적 표현으로부터 외연에로 사상하는 함수인) 개념과 (명제로부터 신념도에로 사상하는 함수인) 확률이, 그 외연과 내포(, 심지어는 초내포)에서 차이나게 될 때에도 그것이 연속적인 경우를 보여준다. 내가 짐작기로, 이 경우를 가장 잘 해명할 수 있는 것은 이 함수들을 보다 원초적인 존재자로 이해하는 것이다.

그러나 개념이나 확률은 행위자가 이해하는 그러한 존재자여야 하는 탓에, 단지 어떤 표현과 대상 사이의 사상 관계만으로 이해되어서는 안 될 것 같다. 차라리 나는 (기능주의적인) 일종의 ‘기계’를 상정하고, 바로 그 기계가 이러한 함수들을 담지하고, 또한 처리한다고 보는 것은 어떤지 생각한다. 그리고 그 기계는 정신적인 기계로 상정되어야 할 것이다. 말하자면 이 기계는 이상적 행위자이다.

이러한 기계를 가정할 때 정신 독립성의 문제는 간단히 해결된다. 어떤 이상적 행위자가 있고, 바로 그 이상적 행위자가 예화하는 개념 함수 내지 확률 함수는, 어떤 개념 또는 어떤 확률에 대한 올바른 사용과 할당을 보여준다. 우리의 정신은 이러한 사용에 실패하곤 하는데, 심지어 모든 현실적 행위자들이 이 사용에 실패할 때에도, (‘실패’의 개념으로부터) 어떤 이상적 행위자가 이에 성공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어떤 이상적 행위자가 이에 성공하고 있다’라는 주장이 이 가정으로부터 따라나오는 셈인데, 이는 이 가정이 그러한 존재자에게 실재로 존재 개입을 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는 의심스럽다. 차라리 다시 이 ‘이상적 행위자’보다 근원적인 ‘합리성’이라는 속성이 있고, ‘어떤 이상적 행위자가 이에 성공하고 있다’라는 주장은 이 속성을 예화하는 대상이 언제든 있다는 주장으로 다시 쓰일 수 있겠다. 그러나 이 때에도, 모든 시간 속에서 그러한 행위자가 있어야 한다는 점이 발목을 잡는다.

여하간 이와 같은 존재 개입을 포용한다고 해 보자. 이제 불일치 사례들에 대한 해석은, 그 존재자가 단일한지 또는 다수인지에 관한 입장이 된다. 유관한 사실에 있어 이상적 행위자가 단일하다고 보는 이들은 불일치 문제가 단지 착시라고 생각할 것이다. 반면 그것이 다수라고 보는 이들은 불일치 문제가 실질적이며, 또한 해소 불가능한 문제라고 생각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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