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고립적이지 않기 위하여

모든 운동에는 두 흐름이 형성되기 마련이다. 한쪽의 사람들은 공동체의 언어로 말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주장한다. 우리의 신앙, 우리의 신념, 우리의 느낌을 우리가 알아들을 수 있는 기호로 소통한다면 그것만으로 충분하다고 말한다. 한편 다른 이들은 그것으로는 부족하다고 주장한다. 우리는 우리의 신앙과 신념, 느낌을 사적인 기호가 아니라 공적인 언어로 풀어낼 수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의 신념이 옳다는 것을 증명해야 하기 때문이다.

종교에서는, 전자는 신비주의가, 후자는 합리주의가 이러한 태도를 표현한다. 신비주의자들은 자신의 주장을 밖으로 표현하는 데에 별 관심이 없다. 하지만 합리주의자는 호교론의 입장에서 강하게 우리의 신념을 표현하여야만 공동체를 지킬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계급투쟁에서는 특정 집단을 배제해야하는지의 여부가 이 태도로부터 갈린다. 배제주의자는 우리가 직관적으로 공감 가능한 것들만 이야기해도 우리의 정체성이 유지되므로, 상관 없다고 말한다. 하지만 포용주의자 내지 확장주의자는 모두가 알아들을 수 있는 이야기를 해야만 투쟁이 성공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말하자면 외재적 정당화를 해야만 하냐는 것이다. 정당화해야 한다는 것은 공동체 밖 사람들에게 자신의 믿음이 옳음을 보여야 한다는 것이다. 정당화에 성공한다면 공동체는 모든 사람들을 자기 편으로 모을 수 있다. 실패한다면 공동체는 사이비 조직이 되고 만다. 정당화하지 않는다면 공동체는 그 고유한 색깔을 유지할 수 있다. 정당화를 수행한다면 신비스러운 공동체의 언어를 공동체 밖의 공공 언어로 풀어내는 과정에서 그 언어의 신비는 다소 후퇴할 것이다. 그렇다면 공동체의 언어 내지 신념은 다소 흐릿해지기 마련이다.

이렇게 생각할 때, 정당화는 일종의 도박이다. 분명 잃을 것이 있고, 얻을 것이 있는지는 불투명하다. 그렇다면 굳이 왜 정당화를 시도해야 하는가? 우리는 우리 신념을 지키면 되고, 굳이 세를 넓혀야 한다면 의지, 끈기, 무력과 같은 비-신념적 수단으로 넓히면 되는 것 아닌가? ⎯ 이것이 배제주의자, 축소주의자, 신비주의자의 일반적 주장이다. 단점은 많고 장점은 적은 선택지를 고를 이유가 없다.

그럼에도 우리는 정당화를 시도해야한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무엇보다 어떤 공동체도 일상언어 공동체 내부에 있다는 것이 그 이유이다. 하나의 공동체는 일상언어 공동체라는 거대한 의미장의 한 양태일 뿐, 독립된 모임이 아니다. 모든 공동체원은 일상언어 공동체의 일원이며, 공동체의 언어는 일상언어의 문법을 따라간다. 그렇다면 일상언어에 적용되는 법칙들도 여럿 갖게 될 것이다. 그래서 일상언어의 문법으로 정당화되는 신념이 아니라면 그 신념은 위태롭다.

위태롭지 않으려면 방법은 둘이다. 자기고립적이 되거나, 정당성을 증명하거나. 전자는 그다지 만족스럽지 못하다. 이미 우리 언어는 자기고립적일 수 없으며, 더 나아가 자기고립적인 공동체는 참되게 살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 또 언어의 본질인 소통에 있어서, 소통의 범위가 확장될 수 없으므로 그 공동체는 죽어가는 공동체가 된다. 그래서 차라리 증명하고, 번역하고, 설명해야 한다. 그것의 위험이 있더라도 말이다.

Read more

진리확정자 그리고 두 종류의 현실주의

가브리엘 콘테사는 이 논문에서 양상 현실주의를 '순한맛'(softcore) 현실주의와 '매운맛'(hardcore) 현실주의로 구별한다. 전자는 스톨네이커로 대표되는 전통적 현실주의이고, 후자는 성향주의로 대표되는 새로운 현실주의이다. 저자는 후자에 대해 제기되는 문제에 대응하고 전자에 대해 새로운 문제를 제기하며 매운맛 현실주의를 옹호하고자 시도한다.

변화들: 다시 여는 말

블로그에 몇 가지 변화를 줬다. 1. 주소를 바꿨다(https://philtoday.kr). 보다 오랫동안 사용하고, 뉴스레터와 연계하기 위해 오래 전부터 계획하던 생각이다. 이에 맞추어 외부용 메일(wj@)과 뉴스레터용 메일(newsletter@) 역시 본격적으로 사용할 예정이다. 명함에 반영해야지. 2. 블로그 이름도 바꿨다. “백야”를 버리고 “오늘의 철학”으로 왔다. 사적인 공간의 이름이었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