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신학적 옹호

중세의 신학자들은 자연 세계를 통해 하나님의 본성이 고찰될 수 있었다고 믿었다. 한편으로 자연신학은 비판될 수 있다. 왜 그러한가? 자연세계 역시 하나님의 은총이 경유되지 않으면 하나의 계시로 발견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이 비판은 아주 근대적인 정신에서 나올 뿐이다. 이 비판은 세속에 대한 신성의 존재론적 우위를 주장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한 우위가 가능하다면 신성을 통해 모든 세속이 설명 가능할 것인데, 오히려 그들은 세속에는 신성이 설명하지 않을(또는 못 할) 여지가 있다는 낌새를 남기는 탓이다.

오히려 우리는 하나님의 모든 존재적 방식에서의 우위를 믿는다. 그렇다면 당연히 영적 공동체 바깥의 것들에 대해서도 모순되지 않는 설명을 도입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다면 또한 공동체 내적인 진리 중 일부를 포기할 수도 있어야 한다. 우리가 계시라고 알고 있는 그 내용 역시, 실제로는 하나님의 모습 자체가 아니라 우리가 어떠한 틀 안에 잡아 낸 하나님의 형상이기 때문이다. 만일 자연에 드러난 하나님의 형상과 공동체가 주장하는 것이 배치된다면, 그 중 어느 것은 포기되어야 한다.

그런데 나는 후자가 포기되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우리만을 선택한 하나님이라는, 악한 신의 가능성을 허용하지 않는 한, 우리는 우리 공동체가 합의한 진리가 직접 계시로부터 독단적으로 이끌어 낸 바임을 인정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직접 계시 자체가 무매개적으로, 자연을 통해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 만일 그렇다면, 우리가 구성한 진리보다 차라리 자연을 통해 발견된 진리가 우선되어야 한다.

(이 메모는 혼란한 존재론적 가정들 위에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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