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종과 인공종

자연종과 인공종이 자연적으로 나뉜다는 믿음에 대한 불만이 있다. 그 경우 발생하는 형이상학적 부담이 크기 때문이다. 자연종을 포함하는 “자연적인 것의 모임”이 있다고 하자. 그렇다면 이 때 자연적으로 실재하는 것은 단지 자연종인 그것들 뿐 아니라 자연적인 것의 모임이 되는 “자연종 집합”까지이다. 그런데 집합의 개념이 자연적이라고 본다면 너무나 많은 추상적 존재자를 자연적 존재자로 인정해야 한다.

하지만 어떤 방법을 통하면, 형이상학적 부담 없이 자연종과 인공종을 나눌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의미 세계 @에서 A는 자연종이다”를 다음으로 번역한다: “@를 공유하는 화자들은, A-개체들을 적시적 정의(ostensive definition)를 통해 완벽히 번역할 수 있다.” “의미 세계 @에서 A는 인공종이다”는 다음으로 번역한다: “@를 공유하는 화자들은, A-개체들을 오로지 적시적으로는 번역할수 없다.”

예컨대 이런 것이다. 사자라는 자연종을 두고, 우리는 “‘사자’라는 낱말이 무엇을 의미하느냐?”라는 질문에 대해 “저것이 갖는 자연적 본질을 공유하는 모든 개체들을 의미한다”라고 답할 수 있다. 이로 인해 ‘lion’과 ‘사자’가 번역된다. 반면 우리는 “‘야시꾸리함’이라는 낱말이 무엇을 의미하느냐?”라는 질문에 대해서는 이렇게 답할 수 없다. 여기에는 한국어 의미 세계를 공유하는 화자들의 독특한 직감이 필요하다. (제거주의자들은 그렇지 않다고 볼 것이다.)

한편 이런 번역 방식 역시 너무나 많은 존재자를 자연적으로 이해하게 하는 듯 보인다. 의자나 책상, 컴퓨터 등도 이렇게 정의할 수 있지 않은가? 그렇지 않다. 그러한 인공물은 기능적으로 정의되기 때문에, 적시적으로는 그것의 본질을 드러낼 수 없다. 이러한 것을 정의하려면 다른 개념으로 그것의 개념을 환원하여 정의해야 한다.

그런데 이렇게 정의된 것이 이해되려면 다른 추상적 개념(적시적으로는 번역 불가능한)을 이해하거나, 그렇지 않다면 그 개념에 자연적 개념(적시적으로 번역되는)이 포함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의자’의 의미는 자연적으로 환원되어 문제 없이 번역되거나, 오로지 추상적으로 환원되어 번역을 위해 독특한 직감이 요구될 것이다. 이렇게 생각할 때 물리적으로 예화하는 인공물은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리고 이런 이유에서 제거주의와 환원적 물리주의는 어려움을 갖는다.)

그렇다면 참임, 착함, 아름다움과 같이 서양 철학에서 근본 개념이라고 여겨온 세 개념은 어떻게 될 것인가? 참인 명제들을 적시함을 통해 무엇이 참인지 번역 가능하다면 참은 자연적으로 실재한다. (타르스키 진리 이론에서는 이러한 번역이 순환적인 문제를 만들 것이다. 그러므로 그러한 진리 입장을 따르려면 진리의 유명론을 받아들여야 한다.) 선한 행위를 적시함을 통해 그것이 번역된다면 선은 자연적으로 실재한다. 아름다움도 그렇다.

허나 그런 번역이 가능하다면 진리 이론, 윤리학, 미학이 존재하기나 했을까? 오히려 그런 탐구의 역사는 아주 사변적이고, 개념적으로 이루어졌다. 이는 어떤 것이 참이라거나, 착하다거나, 아름답다는 주장이 인공적 요소를 포함함을 보여주는 듯하다. 또한 정말 그렇다면, 진선미는 근본개념이 되지도 않는다. 다른 추상적 개념으로 (적어도 일부분) 환원하여 그 의미를 보여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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