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다원주의의 주제

“Religious pluralism, … denote[s] the acceptance and even encouragement of diversity or (and perhaps because of) the view that salvation/liberation is to be found in all of the great world religion[.]”

Chad Meister, “Introduction” in the Oxford Handbook of Religious Diversity.

마이스터의 앞의 말, 즉 “종교 다양성의 수용 및 고양”은 정치적 의미에서의 다원주의이다. 그러니 그가 소개하는 종교다원주의의 철학적 이념은 후자가 되어야 한다. 이와 유사하게도, 힉John Hick은 종교다원주의가 대상으로 하는 종교의 기준이 윤리적인 데에 있다고 주장한다. 그의 말로는, “자기중심성으로부터 실재중심성으로의 전환”을 요구하는지가 종교의 진리 주장에서 핵심적인 부분이다. 이들의 정의를 ‘종교다원주의의 구원론적 정의’라고 부르자.

종교다원주의가 구원론적으로 정의되는 것이 합당한가?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구원의 다양성을 종교다원주의로 여기는 것은, 한편으로는 너무 넓고, 다른 한편으로는 너무 좁은 영역을 만든다. 즉, 이른바 Granularity problem 내지 Scope problem이라고 부를 만한 문제가 나타난다는 말이다. 너무 넓은 것은, 종교가 아니고서도 구원론적, 종말론적 이념을(예컨대 계몽주의나 공산주의, 비거니즘, 에코이즘 등) 가질 수 있는 탓이다. 너무 좁은 것은, 고등종교 외의 원시적 종교 및 무속 신앙 역시 일종의 종교적 진리 주장을 하는 탓이다.

앞의 문제는 수용해도 후자를 수용하지 않을 수 있다. 아니. 애초에 무속 신앙이 종교 다양성의 논의에 낄 수 있는가? 물론 종교 다양성의 논의에는 낄 수 없다. 그러나 무속 신앙이 선제하는 신화적 세계관은, 고등 종교와 대립되는 진리 주장을 제기할 수 있다. 단지 실천적 면에서 대립될 뿐 아니라, 그 실천적 주장을 위해 동원되는 형이상학적 주장으로 인해 형이상학적 차원에서도 대립된다. 구원론적 정의는 이런 대립을 종교다원주의의 진지한 문제로 포섭할 수 없다.

차라리 내가 보기에, 이들이 핵심이라고 여기는 구원의 문제는 본질이 아닌 고등 종교의 수반적 특성이다. 즉, 고등 종교가 구원론에 존재론적으로 의존한다기보단 그 역이 맞다. 모든 고등 종교는 구원론을 제시한다. 그러나 이게 종교다원주의와 무슨 상관인가? 차라리 이는 오로지 종교간 대화에 대해서만 상관있는 요소이다. “종교다원주의”를 여타 다원주의처럼 존재론의 문제로 보자. 존재론, 형이상학적 요소는 진리 주장의 차원에 있는 것이며, 따라서 우리는 진리 주장과 그 충돌에 주목해야 한다.

힉이 An Interpretation of Religion에서 제한하는 것처럼 이 진리 주장은 역사적, 구원론적인 데에서만 표면 상의 충돌을 갖는 것이 아니다. 경험적 대상들이 아닌 추상적 대상들에 대해서도 서로 다른 신학은 실질적인 충돌을 갖는 것처럼 보인다. 힉은 이러한 충돌이 구원론에 무관하다며 별 문제가 안 된다고 넘기고 있지만, 이는 논점을 선취한 판단일 뿐이다.

힉의 존재론적인 면에서는, 이 문제를 처리하는 것이 상당히 옹색해진다.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그가 윤리와 구원 등을 논하는 순간 이미 그는 칸트의 논리와 같은 것이 되고 말았던 탓이다. 칸트적 세계관에서, 모든 진지한 종교적 진리 주장은 자가당착적이다. 하지만 그렇게 보아버린다면 대체 우리는 무엇을 숭배하고 있는가? 결국 칸트적 종교는, 보건대, 도구적 종교 내지 명목 상의 종교일 뿐이다. 종교가 정말 중요시하는 진리 주장, 존재론적 개입의 문제와 이런 도구주의적 입장은 큰 설명적 관계가 없다.

그런 연유로, 힉보다는 Runzo나 (내가 주목하는) Harrison 등의 철학하는 방식이 내겐 더 적절해 보인다. 우리가 먼저 할 것은 이 중 누구의 방식이 다원주의자가 수용하기에 가장 좋은 것인지 판단하는 것이다. 그리고 혹시나 없다면, Byrne과 같은 조금 유한 실재론적 입장을 찾아보며, 다원주의를 포기하면 될 일이다. 어떤 경우에도 중요한 것은 “진짜 문제”를 탐구하는 것이라는 소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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