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석질

자기 말 하는 것과 남의 말을 소개하는 것이 다르다는 것이 나를 D철학에서 멀어지게 한 원인이었다. 정확히는, D철학에 으레 붙는 주석적 성격이 자기 말 하는 내 성격에는 안 맞다고 생각했다. 이 “생각”에 포함되어야 하는 전제는 둘이다. 하나, 주석은 남의 말을 소개하는 일이다. 둘, 남의 말을 소개하는 일로는 자기 말 하는 것이 쉽지 않다. 여기에서 “둘”이 함축하는 바는 이렇다. 잘 소개된 남의 말은 자유롭게 해석될 수 없다. 또는, 조금 윤리적인 의미에서, 남의 말을 자기 말로 소개하는 일은 덕스럽지 못하다.

물론 해석에서 으레 실수가 발생한다. 남의 말을 읽는데 자꾸 자기 말이 개입하는 것이다. 특히 철학적 저술의 해석에서 그 실수가 잦다. D철학 하는 이들은 그 개입이 나름의 선험적 종합이라고 여기는 모양이다. 그래서 내가 실수라고 부르는 그것을 생산적인 철학 방법이라고 부른다. 또는 “해석적 순환”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그것을 실수로 부른다. 그것은 주석적 작업과 창조적 작업을 뒤섞어서 어느 것의 장점도 취하지 못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 이유는, 실수하는 주석은 언어 표현의 기본적 목적을 가로막기 때문이다. 언어의 목적은 세계의 진술은 아니겠지만, 일종의 표현이다. 자기의 표현이 오해되는 것이 실존적으로 불만을 만든다는 것은 언어적 표현의 목적이 제대로 된 자기 표현에 있음을 보여준다. 말하자면 언어의 목적에 자유가 연관된다. 자기의 심리적 상태에 대한 잘 전달된 표현이 언어적 표현이며, 이는 자신이 표현하는대로 자신을 드러내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반면 남의 말을 자기 말로 돌려 한다는 것은 자유를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나의 모든 말이 남의 말, 인 척하는 또다른 누군가의 말 – 그리고 그 연쇄, 로 해석된다는 점에서 주석은 매인 주석이 된다.

실제로 주석과 창조가 모호할지라도, 또한 내가 하는 모든 말이 선입견에 의해 해석된다 할지라도, 나의 말이 정말로 전해진다는 믿음이 필요하다. 이 믿음으로부터 주석과 창조가 개념적으로 분리된다. 나는 덕이니 윤리니 하는 것은 선험적 사실이라는 칸트 식의 생각을 옹호한다. 주석과 창조의 분리가 의미의 전달에 대한 믿음을, 그리고 그 믿음이 나의 말을 가능하게 한다는 점에서 이 분리는 말에 관한 덕을 제공한다.

여튼 그런 의미에서 주석은 여전히 있다. “중요한 것은 나의 논증이며, 따라서 주석이 맞느냐 그르냐 하는 것은 크게 중요하지 않다”라는 태도는 글의 덕을 해체한다. 의미가 전달될 수 있다는 믿음이 해부됨에 따라 나의 글을 다른 글보다 더 명확히 쓰려는 노력이 저지된다. 해석학 이후에 등장한 여러가지 모호한 글쓰기는 이런 저지 가운데에서 발생하지 않았을까? (재미있게도 그들의 모호한 글 역시 일종의 의미 전달을 하려고 노력한 흔적을 보인다.)

한편으로 누군가는 이렇게 말할 수 있다: “덕에 의지한 논증은 불건전하다. 실천적 정당화로부터 인식론적 정당화가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반론은 잘못 놓여 있다. 주석과 창조의 구분은 개념적 구분이지, 실체적 구분이 아니기 때문이다. 문법이나 개념 틀은 세계를 포현하기 위한 수행 작업이다. 그래서 문법학과 개념 분석은 애초에 실천적 정당화만을 갖는다. 따라서 주석과 창조의 구분에는 인식적 정당화가 필요하지 않다.

결국 이런 생각이다. “주석질”이 불가능하다고 함을 통해 해석의 자유를 얻으려는 것은 그다지 좋은 생각이 아니다. 오히려 주석질이 가능하다고 해야 표현의 자유가 보장되고, 그 자유야말로 우리가 언어적 의사소통으로 구가하는 자유이다. 주석질이 가능하다. 그래서 W의 글이 어떤 논증을 제공하는지 말하는 것이 충분히 의미 있다. 또 어떤 논증을 제공하지 않는지 말하는 것이 충분히 의미 있다.

댓글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