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렸나

그래. 솔직히 말하자. 다 질렸다. 언제 이것을 깨달았을까. 오늘 아침, J가 나에게 “현타왔다는 소리구나”라고 했을 때일까. S가 “형은 공부 언제 해?”라고 물었을 때일까. S 모 교의 수업에 실망했을 때일까. 조금 더 거슬러 신입생 강독회 때였을까? 더 거슬러, 더 거슬러.. 여하튼 언제쯤에는 깨달았을 것이다. 언제부터 그렇다면 나는 질려 있었나. 그건 모르겠다.

분석적 방식에 관한 회의인가? M 교수가 “논리적인 작업에는 깊이가 없어⎯”라고 말하며 예견했던? 그렇지는 않다. 나는 어떤 때보다 분석적 스타일로 말하고, 논증하고, 주장을 구조화하는 데에 열정적이다. 철학하는 것, 정확히는 분석적 방식으로 논증하는 것에 있어서 나는 전혀 질려있지 않다. 오히려 그러한 것에 있어서는 아주 활발하다. 그 적에만 활발하다.

그것이라기보다도, 실존적인 질림이다. 만나는 대부분의 것에서 새로움을 느끼기보다는 지루함을 느끼거나, “질림”을 느낀다. 내가 있는 그 순간에서 자꾸만 뒤로 물러난다. 물러난 뒤에 상황을 관조하기만 한다. 딱 그정도. 별로 즐거움이라는 게 없다는 소리다. 어떤 것을 읽어도 별로 위로가 되지 않고, 어떤 사람을 만나도 만족스럽지가 않다. (어쩌면 이것은 매 4월마다 내가 느끼던 감정이다.)

나는 무엇에 질려있는 것인가? 확실한 것은 나의 질림이 나의 일상으로부터 나를 멀어지게 한다는 것이다. 사람들을 나쁜 시선으로만 보게 된다. (소셜) 미디어에만 집중한다. 책을 읽기보다는 영상을 보는 것이 좋다. 진중한 사유를 펴는 것보다 잡담을 하는 것이 편하다. 실없는 이야기를 하다 상처를 주는 편이 훨씬 간편하게 느껴진다. “윤리적인 것”에 잡혀 살아가는 이들에게 전혀 공감이 안 간다.

이런 상태가 그다지 건전하지 못하다는 것은 확실히 안다. 그런데 어쩌란 것인가. 질린 채로 있는 것 외에 뭐가 더 있기나 한가. (어쩌면 이것은 자연주의의 오류를 내포하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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