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과 직장의 중첩된 어딘가; 그 중첩을 떠나며

오늘도 자유교양으로부터 “굴림” 당해버렸다. 50주년 기념 문집에 실릴 기사를 내라고 해서, 끝까지 미루다 후다닥 만들어 버렸다. 퇴고따윈 하지 않고 제출해 버린다. 그렇더라도 진심이 아닌 것은 아니다.


1.

꼬박 네 해를 채웠습니다. 대학 생활과 동시에 시작한 자유교양에서의 공동체 생활이었고, 이제 졸업을 해 3월이 되었니 딱 그만큼이 지났습니다. 그 사이에 많은 것이 변했습니다. 으레 한 시기를 넘기며 느끼듯, 나는 조금은 성숙해진 것 같고 딱 그정도의 값을 치러야 했었습니다. 함께 입학한 남학생들은 이제 제대를 했고, ‘자유교양’이라는 이름을 공유하던 이들의 목록은 자꾸만 바뀌었습니다. 그러한 변화 속에서 자유교양은 나에게 어떤 공간으로 남았을까요.

동아리에서 “노비”라는 별명으로 불리고 있습니다. 원래의 이름은 아니지만, 어쩌다보니 일을 많이 한다는 이유로 이렇게 불리게 되었습니다. 했던 일들을 생각하자면 한편으로는 별 것 아니었으면서도 다른 편으로는 “별 걸 다 했구나” 싶습니다. 천장에 구멍을 뚫어 스크린을 달기도 했고, 사소한 것을 가지고 중요한 일이라면서 다투고 뜯어 고치곤 했습니다. 회장으로 일하면서도 별별 기획을 다 했었습니다. 가끔 자유교양에서 일하며 남겼던 지난 기록들을 볼 때면 뭔가 복잡미묘하달까요.

이렇게 기억되는 자유교양은 마치 직장같습니다. 월급 안 주는 악덕 직장 말이죠. 발제, 재등록, 행사 같은 것을 준비하기 위해 한 주를 통째로 사용했던 기억도 있습니다. 제발 좀 동아리가 굴러가라는 마음으로 다른 사람들한테 일을 자꾸 시키기도 했구요. 뭣하러 이렇게 열심히 하나 싶었다가도 어쨌든 동아리라는 공동체에서 내가 맡은 일이기도 하니 불만 “있이” 했습니다. 여전히 월급 비슷한 것도 없었긴 합니다만, 받는 것이 없었으니 더 직장같은 느낌이 들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한편 “동아리방 지박령”이라고 불렸던 적도 있습니다. 지금은 더 해서 “고인물”이라든지 하는 식으로 불리기도 하지요. 가족이 지방에 사는 탓에 기숙사에서 나오고부터는 쭉 혼자 살았습니다. 혼자 사는 것을 편해 하기는 하지만, 매일같이 홀로 지내는 것이 편할 리 없지요. 외로움이었을지 무기력함이었을지 하는 것 때문에 동아리방에 눌러 앉았던 것이 매일같은 일이었습니다. 소파에 앉아 졸다가, 책을 읽다가, 사람이 오면 이야기를 하다가, 한참 늦어서야 몸을 일으켜 집으로 갔습니다. 그래서 차라리 자유교양은 집같이 느껴집니다

동아리방 때문에만 집같던 것이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명절이 아니고서야 가족을 보러 갈 일이 없었습니다. 고등학교 시절 진작 집에서 나와 학교생활을 한 탓에 가족의 집이 어색하기도 하구요. 자연스럽게 연말이나 기념일에는 서울에 혼자 있었습니다. 그럴 때 함께한 사람들 중 대부분이 자유교양에서 만난 친구들이었습니다. 새해 카운트다운도, 여름 휴가도, 봄 나들이도 이 사람들과 함께 했습니다. 그렇게 보낸 것이 네 해를 채운 셈이니, 차라리 친구가 아닌 가족처럼 느껴지곤 합니다. 그래서 자유교양이 집과 같습니다.

2.

지금의 나는 다시 출가의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다행인지 아닌지 자교 대학원에 진학해 공부를 하고 있으니, 졸업은 했지만 출가는 두 해 정도 유예된 셈입니다. 그러나 유예는 그저 유예 아닌가요. 새로운 임무들이 계속 생겨나고, 사회에서의 일정과 동아리에서의 일정은 자꾸만 어긋납니다. 여전히 열심히 사람들을 만나고 활동에 참여하고 있습니다만, 이러한 어긋남을 보면서 “요람 안에서의 생활”이 슬슬 끝나감을 느낍니다. 그래서 어줍잖은 회고를 할 때가 있는 것입니다.

유예된 시간도, 회고를 할 기회도 없이 떠난 사람들도 있었을 터이니 이 회고는 상당한 사치입니다. 그렇지만 나는 이 사치가 필요한 사치라고 생각하며 그들에 대한 미안함을 덜 생각입니다. 사치하기를 좋아하는 나의 품성 때문에 이 글이 가능한 것 아닐까, 하며 반성 비슷한 것을 하기도 합니다. 나는 철학적 사변으로 공상하기를 즐기며 돈을 모으기보다는 마음가는 곳에 사용하고자 합니다. 그런 사치 뒤에 후회가 따르듯 이 회고 뒤에서 비슷한 가책을 지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무엇보다 자유교양에서 얻은 것은 지식이었습니다. 몇 철학 책을 읽으며 그것을 전공하자는 마음으로 대학에 들어왔지만, 철학과도 아닐 뿐더러 대학원에 가려는 친구들을 찾기도 힘든 통에 무엇을 공부해야 할지 영 막막했습니다. 또 우연히 공부거리를 찾더라도 그것에 대해 토론할 사람들을 찾기도 쉬운 일이 아닙니다. 자유교양은 그런 방황 속에서 거의 유일한 빛이었습니다. 이런 저런 것을 공부하자고 날 보채고, 공부를 하면서는 나의 이해를 계속해서 시험했습니다. 자유교양에서 만난 동료들 덕분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즉 자유교양을 통해 공부의 동료를 얻었습니다. 그들은 내가 신경쓰지 않는 주제의 이야기를 했고, 내가 모르는 언어로 말했습니다. 그럼에도 하나의 대상을 두고 이야기를 했기에, 나는 그들의 언어를 이해하고자 노력해야 했으며 그들의 이야기를 따라갈 수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나는 내 지평 너머에서만 볼 수 있을 풍경을 볼 수 있었고, 그들과 함께 지평을 나눌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계기들을 통해 나는 서로 만나 이야기하는 것의 중요성을 깨달았고, 가까운 몇 동료들과는 새로운 공동체를 꾸렸습니다.

공동체성, 나는 이 부분에서 자유교양에게 가장 크게 빚졌습니다. 공동체가 아닌 개인으로서 나아가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생각이 대학 시절 초기까지만 해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자유교양에서 만난 이들은 낯선 얼굴로 반복해 다가왔고, 나는 이 생각을 허물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얼굴들은 나에게 새로운 세계를 보여주었고, 그 세계의 풍경에 매료되어 나는 공동체의 중요함과 그 속에서의 기쁨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누군가는 가족으로부터, 누군가는 교회로부터, 누군가는 학교로부터 얻는 깨달음을 나는 자유교양에서 얻었던 것입니다.

3.

나는 자유교양이라는 집과 직장을 동시에 가졌고 이제 그 둘로부터 동시에 떠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 떠난다는 것이 오로지 떠나는 것은 아닐 터입니다. 동문의 일원으로 소속되어 연락을 받을 적에 귀찮아 하면서도 몇 사람의 얼굴을 보자며 버스에 오를 것이고, 여전히 자유교양에서 활동하는 친구들을 만날 것이고, 자유교양에서 만난 또다른 동료들과 모임을 지속하겠지요. 또 그들과 함께 배웠고 이야기했던 화두를 기억할 것이고, 그 화두가 나의 다음 발걸음을 인도할 것이기도 합니다.

여전히 누군가는 나를 노비라고 부르겠고, 누군가의 핸드폰에는 “명예고문”으로 저장되어 있을 것이며, 나는 그 사람들을 또 그들의 별명으로 부르지 않을까요. 이름은 단지 이름이지만, 그럼에도 그 이름에 관련된 상황들을 통해 우리는 그 이름을 기억합니다. 마치 “샛별”과 “개밥바라기”가 동일한 것을 일컫지만 둘이 말하는 상황은 전혀 다르다는, 언어철학에서의 구태한 예시가 보여주듯 말입니다. 어찌되었든 나는 그런 식으로 자유교양에서의 기억을 남길 수 있을 것입니다.

또 그 기억을 돌아보는 순간마다 때로는 잊고 있던 중요한 사실들을 환기할 수도 있겠지요. 공동체 안에서 더 큰 풍경을 볼 수 있으리라는 것, 다른 곳에 매몰되어 잊고 있던 중요한 문제들, 또 그 문제들에 관해 다른 이들은 어떤 풀이를 취했냐는 응답. 이런 것들을 잊을 때에 나는 무지와 무감각에 매몰되곤 합니다. 그런데 나의 주변에 자유교양의 흔적이 있고, 그 흔적을 통해 그 때의 기억을 되살릴 수 있으리라 희망합니다. 그 희망이 헛되지 않다면 나는 좀 더 나은 사람으로 살기를 이어갈 수 있지 않을까요.

더 나은 사람으로 살아간다는 것. 실제로 나는 자유교양에서의 대화들을 통해 내가 만남 속에서 염두에 두어야 할 의무를 생각하게 되었고, 자유교양에서의 경험들을 통해 공동체, 특히 종교공동체의 일원이 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내가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다면 그러한 만남과 공동체 속에서 더 나은 사람이 되는 것 아닐까요. 단지 공동체에로 돌아가는 데에 그치지 않고, 그 돌아감이 폭력 내지 폐가 되지 않기 위해 더 나은 공동체원이 되자는 것, 그런 바람이 있습니다.

이렇게 생각하니 자유교양에서 얻은 것 뿐 아니라 그 중에서도 남길 것이 참 많습니다. 아니, 많다기보다 나의 전체를 자유교양은 남긴 것이 아닌가, 이렇게 과장되게 말해 봅니다. 그렇게 남은 전체를 가지고 나는 나의 앞으로를 잘 열어갈 수 있으리라 믿고, 그것을 바랍니다. 순수한 학생으로서의 시기를 마치며, 2019년 이 해, 나는 나의 삶에서 모종의 분기를 마주합니다. 그것이 자유교양의 시대적 분기와 함께 한다는 것이 감회가 새롭습니다. 이 분기를 지나면서도 지나온 시간에서 얻은 바를 잃지 않고 다음 시기로 나아가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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