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의 보수성

  • 통념보다 철학은 보수적인 작업을 하는 학문이다. 가장 정치적 실천을 중시하는듯 보이는 프랑스 현대 철학도 그렇다. 이른바 “생성의 철학”과 “진리의 철학”이 구분될 수 있다 해도, 이른바 “윤리적 전회”라는 것이 발생했다 해도, 철학적 작업은 어느 정도의 보수성에서 더 나아가지 않는다. 여기에서 언급되는 보수성은, 그것이 피분석항의 변혁에 관여하지 않기로 요구된다는 의미이다. 만일 그러한 관여에 기여한다면, 이미 그 분석은 거짓이 되므로 자가당착의 오류에 빠진다.
  • 최대한의 참여에서 요구된 것이 생성의 철학일 터이다. 이 경우에 철학은 진리의 생성 과정에 주목함에 따라 분명한 진리를 말할 요구를 받지 않는다. 그러나 이 때에도 피분석항이 건재하다. 왜냐하면, 실상 이 때 피분석항은 일상세계가 아닌 그 세계를 분석하는 방식들이기 때문이다. 생성의 철학은 그 방식의 부산물인 체계 상대적 진리들이, 매번 생성하는 차원에서 고찰되어야 함을 주장한다. 그 결과 생성의 철학은 메타철학적 작업에 고착된다. 피분석항은 아주 추상적인 인공적 개념에 한정되거나, 그렇지 않다면 전체 분석이 부조리해진다.
  • 여기에서 나오는 응답이 “메타이론/메타언어는 없다”라는 테제이다. 실상 생성의 철학의 시점에서 메타 관점은 성립하지 않으므로, 그 철학은 애초에 “메타철학”이 아니게 될 것이다. 따라서 생성의 철학은 메타철학으로 전락하는 위기를 극복한다. 그러나 이 때 발생하는 것은 체계의 모순성이다. 생성의 철학이 메타이론이 아니라면 그 스스로의 진리 역시 온당한 것이 될 수 없다. 이것을 인정하는 것이 데리다의 방식이다. 그러나 그 역시도 어느 정도의 보수성을 지니고 있다.
  • 철학의 보수성은 결국 세인들이 “철학”이라고 부르는 그러한 기대를 무마한다. 세계의 변혁이 중대한 과제라는 마르크스의 논제는 철학에겐 무력하다. 그것은 철학의 문제가 아니다. 진리는 이미 세계에 있거나, 기껏해야 공동체의 것이기 때문이다. 철학자는 진리에 관한 진리에 봉사할 뿐, 진리를 발견하지 않는다. 정치가를 겸할 만한 철학자는 없다.
  • 그렇다면 왜 아직도 철학인가? 이에 대한 답이 “반철학”이다. 그러나 그 역시 갖는 문제는, 반철학 자체가 하나의 철학이라는 점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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