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적 대화’

내가 철학을 한다고 하면 많은 사람들이 기대할 법한 이미지가 있다. 그 중 하나는 이른바 ‘철학적 대화’를 기깔나게 하리라는 그런 기대일 것이다. 그런데 나는 이상하게도 그들이 기대하는 ‘그 대화’에 끼기가 좀처럼 쉽지 않다. 철학적 대화의 적절한 주제라고 통상 생각하는 많은 주제들이, 내가 보기로는 철학적으로는 매우 사소한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가령, ‘삶의 궁극적 진리’에 관해 묻는 이들이 있다. 이들은 뭘 기대하는 것일까? 철학적 관점에서, 진리란 사물이 아닌 진술에 대해 성립하는 특징이다. 우리가 참이나 거짓이라고 하는 것은 어떤 진술이다. 한편 ‘진술’의 측면에서 볼 때 세계에 관한 궁극적 기술이란 없거나, 아주 사소하다. 세계에 성립하는 사실들의 총체 또는 그 총체를 함축하는 컴팩트한 진술 집합의 원소들의 연언을 궁극적 기술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이는 ‘심오하지’ 않다. 그러나 이들 진술들 뒤에 숨은 ‘심오한’ 궁극적 진술이란 무엇인가? 난 그런 것이 없을뿐 아니라 그러한 진술의 개념 자체가 괴상하다고 생각한다.

또 ‘사랑이란 무엇인가?’를 묻는 이들이 있다. 이들이 뭘 기대하는 것인지 나는 사실 아직도 모르겠다. 사랑이 인간의 사회적 행위로 고찰될 때, 사랑의 본질은 사회학자가 잘 알 것이다. 사랑이 인간의 생리학적 측면에서 고찰될 때, 사랑의 본질은 생리학자나 해부학자가 잘 알 것이다. 낱말 “사랑”이 문학적으로 쓰이는 경우를 고찰할 때, “사랑”의 문학적 의미는 문학가가 잘 알 것이다. 한편 철학자는? 철학자가 과연 사랑에 관해 말할 만한 것이 얼마나 있을런지 모르겠다.

또 철학적 주제이지만서도 사람들은 그 주제를 철학적이지 않은 측면에서 고찰하면서 철학자들이 그 고찰에 참여하길 바라곤 한다. (이 문장을 쓰면서도 내가 뭐라고 하는 건지 모르겠다.) 질료적 응답과 형식적 응답이 모두 가능한 질문에 있어 전자의 응답을 기대하며 철학자에게 묻는 경우가 그렇다. 위의 ‘진리’ 사례도 이와 같은 맥락이라고 하겠다. 질료적 응답을 주려는 철학은 단적으로 말해 18세기에 끝났다. 철학자가 과학을 겸하지 않고서야 그는 형식적이고 원론적인 답을 줄 뿐이다.

그렇다면 철학의 의의는 무엇일까? 철학적 대화를 통해 기대하는 바를 철학이 무시한다면 철학은 무용한 것 아닌가? 아니다. 비록 우리가 심리학자나 생물학자, 논리학자에게 바라는 것과 그들이 실제 학문의 장에서 하는 일이 다르지만 그들의 일의 의의가 있듯, 철학자들의 일도 그렇다. 철학자들은 우리가 세계를 보는 방식을 제안하지는 않더라도 이미 있는 방식들을 교정하고, 세련되게 한다. 또 그 과정에서 모호하고 오도되었던 개념들을 수정한다. 철학에 쓸데없는 것을 요구하지 않고 철학자들이 하는 그 일들만을 요구하고, 그 일들에 관심을 갖는다면, 철학자들의 일은 분명 쓸모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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