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유

  • 여러가지 방식의 치유가 있다. 어떤 문화는 치유를 위해 물리적 방식을 동원하고, 어떤 문화는 상징을, 어떤 문화는 언어를 동원한다.
  • 이원론적 종교가 하나의 치유 방식으로 작동한다. 어떻게? 탄원자의 특정한 결여에 대해, 그 결여를 악신의 책임에 돌린다. 문제는 여전히 남지만 그 탓은 저 멀리 있는 악신에게 있다.
  • 상담이 하나의 치유 방식으로 작동한다. 어떻게? 상담에서는 언어가 매개가 되긴 하지만 그 언어는 일상적인 것과 사뭇 달라보인다. 대화에 포함되었던 명제가 아니라, 그 문장들을 통한 내담자의 감상이 치유로 이끈다.
  • 귀신의 이름을 호명하여 치유를 이끌어 낸다. 어떻게? 귀신 들렸다고 사제가 간주하는 이의 증상에 대해, 그것에 대응하는 귀신을 차례로 부른다. 어떤 과정에서인지 대상자는 “치유”를 입는다.
  • 물리적인 치유는? 내가 바로 그러한 치유를 근본적인 것으로 여기는 문화권 안에 있으므로 나는 이에 대해 많은 말을 할 방법이 없다.
  • 치유의 방식 자체가 다양하다.
  • 어떻게 생각하면, 애초에 내가 다른 결과를 원했더라면 다르게 행동했을 일이었다. 내가 이대로 행동했던 것은 딱 이런 결과라도 별로 피할 생각이 없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난 여전히 빈말하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은 그런 것이 있다.)
  • 누군가의 자연적 반응이 애초에 별로 치유에 도움되지 않아 보인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그를 멈춰세워야 하나? 하지만 적어도 그것은 내가 할 일은 아니다. 잘못의 인정을 품는 것 외에 내가 할 일은 없고, 딱 그정도만큼의 마음만이 생기는 것이기도 하다.
  • 모든 사람이 치유사가 될 의무를 갖는 것도 아니며, 더욱이 어떤 상황에 관련되어 있는 사람은 그 상황의 문제를 치유할 수 없는 법이다.

(어쩌면 이 메모 전체가 나의 치유를 위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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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확정자 그리고 두 종류의 현실주의

가브리엘 콘테사는 이 논문에서 양상 현실주의를 '순한맛'(softcore) 현실주의와 '매운맛'(hardcore) 현실주의로 구별한다. 전자는 스톨네이커로 대표되는 전통적 현실주의이고, 후자는 성향주의로 대표되는 새로운 현실주의이다. 저자는 후자에 대해 제기되는 문제에 대응하고 전자에 대해 새로운 문제를 제기하며 매운맛 현실주의를 옹호하고자 시도한다.

변화들: 다시 여는 말

블로그에 몇 가지 변화를 줬다. 1. 주소를 바꿨다(https://philtoday.kr). 보다 오랫동안 사용하고, 뉴스레터와 연계하기 위해 오래 전부터 계획하던 생각이다. 이에 맞추어 외부용 메일(wj@)과 뉴스레터용 메일(newsletter@) 역시 본격적으로 사용할 예정이다. 명함에 반영해야지. 2. 블로그 이름도 바꿨다. “백야”를 버리고 “오늘의 철학”으로 왔다. 사적인 공간의 이름이었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