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 사태에 관한 단평

주장. 나는 세월호 사건이나 (이른바) “국정농단 사태”의 경우에서의 박근혜 정부의 책임과, 코로나19 사태에서의 문재인 정부의 책임이 상이하다고 생각한다. 반면, 메르스 방역에 있어 박근혜 정부의 평가와, 코로나19 방역에 있어 문재인 정부의 평가가 대비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논증. 세월호 사건에서와 국정농단 사태에서 박근혜 정부(또는 박근혜 개인)가 비판받았던 것은, 명시된 형식적 의무의 불이행 및 위반에 의한 것이었다. 이것은 질적 평가가 아닌 진위 평가만으로 판단될 수 있는 부분에 해당한다. 반면 공중보건 정책을 포함하여, 정책 평가는 진위 평가가 아닌 질적 평가를 통해 이루어질 사항이다. 따라서 둘은 범주가 다르다. 즉, 둘은 같은 선에서 평가될 수 없다.

오늘날의 학문적 분업은 해당 전공 분야의 사태에 관한 평가를 그 전문가들에게 위탁하게끔 되어 있다. (퍼트남의 Elm-Beech 사례를 보자면, 질적 판단으로부터 진위 평가로의 모든 사상mapping이 궁극적으로는 그렇다.) 공중보건정책이 성공적인지 여부는 정치적으로 결정될 것이라기보다는, 사후적으로, 역학 및 감염의학, 공중보건학 전문가들에 의해 평가될 것에 해당한다. 이것이 정치적 의사 결정에 개입하는 것은 그 이후의 것이어야 한다.

혹자는, 제18대 대통령의 탄핵이 동일한 논리로 무효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할 수 있다. 그렇지 않다. 탄핵 “소추”를 정당화한 것은 당시 나왔던 몇 증거들로부터였다. 또한, “탄핵”을 정당화한 것은, 평가 주체로 위탁된, 헌법재판관들의 법리적 판단으로부터였다. 여기에서 “사후적 결정”에 해당하는 것은 탄핵 자체가 아닌, 탄핵에 대한 우리의 평가여야 한다. 그러니 동일한 논리가 적용되어야 하는 것은 탄핵에 대한 우리의 평가 부분에 해당한다. (예컨대, “제18대 대통령의 탄핵은 애석한 일인가?”)

그렇다면 혹자는, 대통령 문재인의 탄핵 소추 및 탄핵이 동일한 논리로 정당화된다고 주장할 수 있다. 그렇지 않다. 현재 문재인 정부에 대해 비판되는 것은 “방역 대책이 올바르지 않았다”라는 질적 평가이다. “문재인 정부가 중국과 결탁한 문서”나, “문재인 정부의 책임 방기”와 같이 진위판단으로 결정될 수 있는 것은 아직 등장하지 않았다. 그것이 이른바 “국정농단 사태”와 현재의 코로나19 관리 실패 사태의 결정적 차이이다.

보론 하나. 위 논증은 문재인 정부가 코로나19 방역에 대해 비판받을 수 없다는 주장이 될 수는 없다. 사태가 종식되고 나면, 메르스에 대한 박근혜 정부의 방역 대책과 코로나19에 대한 문재인 정부의 방역 대책이 대비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사후적인) 비교 연구에 기초하여 문재인 정부의 공과를 구분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중 과가 큼이 입증된다면, 문재인 정부는 충분히 비판받아야 한다.

보론 둘. 위 논증은 코로나19에 대한 문재인 정부의 대책이, 현재, 정치적으로 비판받을 수 없다는 주장이 될 수는 없다. 다만 이 대책에 대한 질적 평가가 전제되어야만 하는 그러한 진위 평가, 예컨대 대통령 문재인의 탄핵 등이 현재 논의되는 것이 부적절하지 않냐는 것이다.

보론 셋. 위 논증의 두번째 단이 주장하는 다른 바는, 문재인 정부의 방역 대책에 대한, 사후적이지 않으며 전문적이지 않은, 우리의 평가가 정당한 진위 평가 내지 “사실 판단”이 될 수 없다는 점이다. 아직 그러한 평가 내지 판단을 할 근거는 마련되어 있지 않으며, 우리가 지금 하고 있는 일은 단지 문재인 정부의 방역 대책에 대한 각자의 불쾌감을 표현하는 데에 그친다고 보아야 한다.

보론 넷. “사실 판단”과 “가치 판단”이 상호의존적임으로부터 위의 논증이 불건전해지지 않는다. 상호의존성 논제가 말하고 있는 바는, 말 그대로 둘이 의존적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으로부터 “모든 사실 판단이 정치적 평가의 연장선이다”를 끌어낼 수는 없다. 사실 판단이 의존한다고 불리는 “가치 판단”이란, 단지 정치적인 것이 아닌, 방법론적 타당성, 증명의 간결성 등을 포함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보론 다섯. 진위 평가가 질적 평가와 분명히 나누어지지 않음으로부터 위의 논증이 불건전해지지 않는다. 모호성 논제가 말하고 있는 바는, 두 평가 집단의 구분이 (인식적으로?) 자명하지 않다는 것이다. 이는 어떤 자명하게 진위 평가인 것이, 그리고 질적 평가인 것이 존재한다는 것과 충돌하지 않는다. 또한 분명 어떤 평가는 자명하게 진위 평가이기도 하다. 예컨대, “제18대 대통령은 최서원에게 직무상 비밀인 문서를 건넸는가?”

+) 때로 우리는 전문가들의 판단이 우리 마음에 들지 않을 때, 그들이 “정치적으로 편향된” 전제를 갖고 출발했다며 비판하곤 한다. 그러나 그들의 전제가 정말로 편향되었는지 여부는 전문가 집단 안에서 비판적으로 평가되어야 하는 대상이다. 그들의 판단은 (적어도 “공적으로는”) 정치적 공론장이 아닌 한 학제 내에서의 것이기 때문이다. 그 판단이, 전문가들로부터 합의된다면, 잘 이루어진 것이라고 믿는 것이 과학을 신뢰하는 첫번째 걸음이다. 이를 믿지 않는 것이 이른바 “음모론적” 또는 “비과학적” 사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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