퍼트남과 칸트와 헤겔

모든 철학자들이 자신을 칸티안이라고 부르는 것이 사실이다. 또한, 그만큼이나, 자신을 헤겔리안이라고 부르는 것을 치욕으로 여기는 것도 사실이다.

퍼트남은 어떠한가? 그는 스스로를 칸티안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해리슨은 그런 퍼트남을 개조하여 종교다원주의 모델을 만든다. 그런데 진정으로 그들이 칸티안이라면, 아주 진지한 칸티안인 힉과 배치된 모델을 만들 이유가 없어 보인다. 그러나 힉과 해리슨은 아주 배타적이다.

또한 나는 카르납이 매우 칸트적이라고 생각한다. 적어도 그의 내적 문제와 외적 문제의 구분에 관한 논문들을 읽자면 그렇다. 그렇다면 퍼트남이 진지한 칸티안일 때, 그가 카르납과 일치하는 지점이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퍼트남은 카르납과 꽤나 멀다.

차라리 내 생각에 퍼트남은 헤겔리안이다. 실재와 이념을 일치시키는 방식으로 진리를 사유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그의 “이상화된 합리적 수용가능성”은 노골적인 헤겔리안적 진리 모델에서만 가능해 보이는 것이다.

퍼트남은 헤겔을 몰랐는가? 그랬을 리는 없다고 생각한다. 스스로가 자신의 헤겔리안적 성향을 알았는지는 모르지만, 많은 선배 철학자들이 그러했듯, 스스로를 헤겔적이라고 부르기를 꺼렸을 뿐이었겠다고 생각한다.

반면 자신을 헤겔리안이라고 부르는 이가 있다. 로티가 그렇다. 심지어 그는 스스로를 스피노지언이며, 니체이스트라고 주장한다. 글쎄, 나는 로티가 정말 그런지 잘 모르겠다.

자신을 누구누구주의자라고 부르는 사람 치고 정말 그런 사람을 잘 못 본다. 세상에 믿을 진술 하나 없다.

댓글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