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위로

사람들이 많이들도 죽는다. 부고를 자주 접할 나이가 된 것인가, 싶다가도, 그래도 그렇지 이 나이에 이렇게, 라는 생각이 들 딱 그만큼 부고를 듣는다. 한 달 걸러 한 번. 가까운 사람의 친지는 서너 달에 한 번. 애매한 사람은 조금 더 자주. 전혀 모르지만 조직 상의 관계로 듣게 되는 부고는 많게는 한 달에도 몇 번씩이나 있다.

먼 사람이야 그렇다 쳐도. 가까운 사람 또는 어떻게든 관계가 있는 사람의 친지가 죽었을 때 애도하는 법은 여전히 어렵다. 형식적인 뭔가를 하는 것은야 물론 어렵지 않다만, 그 애도라는 것을 진심으로 한다는 것은 영 괴상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그래서 딱 진심까지만의 위로의 말을 전하고자 한다. 그렇다보니 위로의 말은 언제나 피상적이다.

어떤 이들은 하나님의 위로를 기원한다. 또는 하늘로부터의 위로를 기원한다. 실제로 두 말은 같은 말이다. ‘하늘로부터의 위로’의 근원에 있는 기독교 사상은 그레코-로만 세계에서 영향받은 세계관이고, 그 세계관은 하늘과 신적 권위를 동일시하기 때문이다. 하나님 나라는 하늘 나라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위로라는 것이 대체 무엇인가? 그것은 과연 죽은 이를 위로할 수 있는가? 이것이 때로 맞게 되는 문제이다. 하나님은 어떻게 그를 위로할 것인가? 비자연적 신성이 자연세계에 육화하여 위로하는 것인가? 귀신이 나타나 위로의 말을 건네는 것인가? 모든 일에 행운이 따르게 하는 것인가?

회의주의자는 어떤 경우에 있어서도 위로의 실현에서 “하나님”이 제거될 수 있다고 말할 것이다. 자연세계에 육화한 이상 그것은 이미 자연의 일부이지, 비자연적 신성일 필요가 없다. 위로의 말을 건넬 수 있다면 귀신이 아니다. 행운은 우연적인 것이기 때문에 다른 우연들과 마찬가지로 인과에 따라 설명될 것이지, 신성이 개입할 이유는 없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위로를 기원하는 것이 무엇인가? 화행론자는 그 기원을 (이미 그들이 기원을 하나의 화행으로 분류하듯) 단순히 공동체적인, 또는 위로를 위한 화행으로 여기는 데에 그칠 수 있다. 그런데 그러한 그침이 공동체의 언어를 잘 반영하는가? 모든 것을 화행으로 돌리기엔, “안녕하세요”같이 순수한 기호로 사장된 표현이 아닌 이상에야, 위로의 기원 역시 어느 정도의 진술을 함축하고 있는 법이다.

어떤 표현이 발화효과를 가지면서 동시에 진술을 함축한다. 그렇다면 그 함축된 진술이 참인지, 거짓인지는 여전히 문제가 된다. 그런데 그 진술이 형이상학적 진술이다. 따라서 그것에 대한 이념적, 내지 선험적 해명이 요구된다. 여전히 “하나님의 위로”가 무엇이냐는 질문이 끝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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