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겨울 이야기

최근 백야에 방문이 뜸했다. 인스타그램을 통해 논문 후기를 공유하기 시작했던 탓이다. (위젯을 하나 들여야겠다.) 또한 이곳에 옮길 만한 아이디어가 없기도 했다. 방학 중에는 학술논문 투고거리를 하나는 만들려고 했는데, 딱히 떠오르는 것이 없다. 원래는 무신세계, 유신세계 또는 타종교세계를 상상할 때의 불가능사고에 관한 논문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는 한국에서 논의된 적이 없던 것이기도 하고, 애초에 불가능사고에 관한 연구 자체도 국내에서는 많이 이루어진 적이 없었다. 내가 뭔가 생각나는 것이 많지 않기도 했다.

그래서 한동안 가능세계 및 불가능세계에 관한 자료들을 읽다가, 읽는 자료의 분야를 선회했다. 학위논문에 치중하는 것이 낫다고 판단한 탓이다. 종교다원주의에 관한 논문을 주로 읽는 중이다. 특히 내재적 실재론의 옹호가 종교다원주의를 무해하게 만든다는, 해리슨의 연구를 중점적으로 보고 있다. 내재적 실재론이 다원주의에 기여하는지와 별개로, 나는 내재적 실재론을 설득력있는 것으로 여기면서 동시에 종교다원주의를 지지한다. 그러니 해리슨의 주제는 나에게 아주 흥미롭다.

겨울에는 소모임을 두 개 하고 있다. 하나는 퍼트남의 책을 읽는 모임이고, 다른 하나는 부분론에 기반한 존재론에 관한 공부 모임이다. 둘 모두 나름 순조롭다. 사람이 처음엔 많이 모였다가 하나씩 빠져서 둘 다 꽤나 비어버린 것이 당황스럽지만. 나에게 공부가 된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봄에 열 소모임에서도 마찬가지 충분함을 경험하면 좋겠다. 다만 무엇을 주제로 할지가 애매하다. 형이상학 아니면 종교철학인데, 종교철학은 해 봐야 수요층이 없을 것이다. 형이상학을 지금 하는 것이 마땅한지도 잘 모르겠다.

연구는 그렇고, 사역에도 변화가 좀 생겼다. 이제 지방회에 등록되어 서리전도사로 일하게 된다. 선교소식지는 창간호가 곧 발행될 예정이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이런저런 식으로 나에게 책임이 더 늘어난 느낌이 든다. 조금이나마 교회에 얼굴이 팔린 상태가 되었다. 아이들의 이름은 아직은 잘 외워지지 않는다.

이런 식으로 2019년을 보냈고 2020년 첫 달을 끝내고 있다. 부디 이후가 잘 지나가면 좋겠다. 논문도 잘 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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