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reatio ex nihilio

“무로부터의 창조”가 가능한가?:

첫째. 신적 창조는 어떤 창조인가? 질료에 대한 창조라면, 그러한 창조는 무한퇴행적 창조이다. 신이 오로지 정신적인 것이 아닌 한 바로 그 신을 누군가가 창조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신이 오로지 정신적이라면, 그것은 질료적 차원에 인과적 영향을 줄 수 없다. 따라서 어떤 경우에도 질료에 대한 창조가 불가능하다. 따라서 신적 창조는 형상에 대한 창조이다.

둘째. 형상에 대한 창조는 무로부터의 창조일 수 있는가? 존재할 수 없는 것들로부터의 창조라면, 그렇지 않다. 그러나 현행적으로 어떤 이념을 구현하고 있다고 여겨지지 않는 것들로부터의 창조라면, 그렇다. 우리는 후자에 대해서도 “무”라는 표현을 사용할 수 있다. 어떤 형상도 실현하지 않는 순전한 개별자들의 덩어리는, 그 원자적 개별성에 대해서는 의문시될 점이 있겠지만, 도대체 “존재한다”라는 말을 하기 어렵다. 따라서 그러한 혼돈의 덩어리 역시 “무”라고 불릴 만하다.

셋째. 형상에 대한 맥락에서, 무로부터의 창조가 가능한가? 창조를 “여건들을 이질적으로 재구성하는 작업”이라고 간주해 보자. 형상이 부과되지 않은 질료가 하나의 여건이라면, 그것을 하나의 세계로 재구성하는 작업은 창조이다. 한편, 그러한 개념화 이전의 질료들로부터 어떤 형상을 취할 수 있는지가 그 자체로 의심스럽다. 설사 창조 이전의 무엇이 있었다고 해도 그 무엇을 질적으로 규명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따라서 우리는 무로부터의 창조 이상을 상상할 수 없으며, 우리의 의미부여에 한해서는 무로부터의 창조만이 가능하다.

형상적 맥락에서, 무로부터의 창조가 무엇을 의미하는가?:

첫째. 무로부터의 창조는 창조주의 우주론적 역량을 말하지 못한다. 즉 창조주는 세계에 대해 그것의 운행을 규명하고, 그 세계를 구성하는 존재자들을 각각의 고유한 형상으로 재구성한다.

둘째. 무로부터의 창조는 무제약적 창조를 함축하지 못한다. 형이상학적 필연성의 맥락에서 볼 때, 논리적으로 부조리한 세계은 상상될 수 없다. 따라서 창조주는 특정 규칙들로부터 제한된 세계만을 창조한다. (단, 비트겐슈타인의 언급들을 수용하자만 그러한 규칙의 존재가 창조주의 특정 양태에 제한된 창조를 (인과적으로) 야기했다고 하기엔 문제가 있다.)

셋째. 무로부터의 창조는 이원론을 함축하지 않는다. 무와 존재라는 이원론이 있다고 할 수 없다. 우리는 어떤 속성을 어떤 개별자가 예화할 때 그것을 존재한다라고, 즉 어떤 개체변항이 어떤 술어에 대해 존재양화사로 구속되거나 그러한 구속을 함축하는 문장에 대해 말할 때, 우리는 어떤 것이 존재한다고 말하는 셈이다. 그렇다면 “이원론”은 불가능하다. 애초에 그러한 예화가 없는 순수 질료적 차원에서, 어떤 것이 존재한다는 진술이 부조리하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이원론은 존재양태가 환원 불가능한 둘로 나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한 이원론은 형상적 창조로부터 함축되지 않는다.

형상적 창조가 모든 세계를 설명하는가?:

첫째. 형상적 창조는 “세계”라고 불리는 모든 것을 설명한다. 설령 “질료”라고 불리우는 바로 그것에 대해서도, 그것이 질료라고 불리우는 한 그것은 세계의 일부로서 특정한 형상이 부과된 존재자이기 때문이다. 질료라고 불리우는 그것은 형상 너머에서는 무의미한 것으로, 세계 밖의 것으로 여겨져야 한다.

둘째. 형상적 창조는 질료 자체를 설명하지 않는다. 그러한 질료가 있다면, 그것은 어떤 가능성의 총체로도 이해될 수 없고, 어떤 속성도 예화하지 않는 순수한 질료는 애초에 이해될 수 없다. 이해되지 않는 것을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셋째. 형상적 창조는 서로 다른 세계가 하나의 질료에 근간하는 데에 신비주의적 희망을 의탁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의탁은 그 자체로 부조리하다. 다른 세계를 통일할 모종의 여건이 있다면, 그것은 설령 전언어적일지언정 어떤 형상도 실현하고 있지 않다고 일컬어질 수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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