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야

해가 하늘로 떨어졌다. 백야였다. 누군가는 자신의 나라를 <해가 지지 않는 나라>라고 부르며 즐거워 했다고 했다. 하지만 정말로 해가 지지 않는 날, 그 태양의 그림자 앞에서 H는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해가 지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하루가 지났다고 할 수 있냐는 것이 그가 늘 품어 온 생각이었다. 세계를 둘러싸는 모든 것들이 각자의 할 일을 마치고 새로운 세계가 도래할 때에야 하루는 지나간다. 해가 지지 않으면 밤도 없고 새로운 하루도 없다. 태양이 사라진다는 것, 그리고 달과 별이 하늘을 채운다는 것, 그것이 오늘을 내일과 다르게 만들었다. 그런데 해가 지지 않는 오늘은 달과 별이 태양을 밀어내지 않는다. 태양은 그저 하늘로 곤두박질치고 다시 떠오를 것이다. 대체 어떻게 이 하늘을 보고도 오늘과 내일이 다르다고 할 수 있단 말인가.

연속된 선에 경계란 없는 법이다.

떨어지는 해는 지평선 위에 걸린다. 지평선이 없이도 백야가 있을 수 있을까, 문득 의문이 생겼다. 지평선은 오늘과 내일의 경계를 만든다. 달이 뜨는 날, 태양은 지평 아래에로 숨어든다. 그런데 오늘이 내일과 구분되지 않아도 지평선이 있을까. 해가 사라지지 않는 오늘의 지평선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H는 한숨을 쉬며 자기의 망상을 비웃었다. 해가 뜨고 져도 스물 네 시간의 한 날은 간다. 해를 가릴 수는 없더라도 내 앞에 그어진 선이 하늘과 땅을 나누고 있다. 하지만 지평선이 없다면? 그는 다시 처음의 망상으로 돌아온다. 지평선이 없다면 백야가 있을 수 있을까. H는 그런 것을 상상할 수조차 없었다.

그의 세계는 언제나 지평이 둘려 있다. 해가 뜨고 지는 것을 본다는 것은 이미 그 지평 앞에 선 하나의 인간이 그것을 보는 것과 같다. 지구는 지평선 없이도 백야 가운데에 있는 것일까, 그의 지평은 무엇일까, 온종일 석양이 지는 나라가 있을까, 그 곳에서는 태양의 그림자를 볼 수 있을까? 어두워질 무렵에야 그는 몽상을 그쳤다.

해는 땅 아래로 사라졌고 이제 달이 하늘로 떨어질 차례가 되었다. 자정 즈음 H는 집을 향해 묵묵히 걷는다. 달력이 두 번 넘어간 다음에야 달은 바닥을 향해 곤두박질친다. H는 바로 그 달을 보고 있다. 지금쯤 지구 반대 편에서는 달력이 넘어가고도 태양이 얼굴을 드러내지 않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태양이 고개를 들지 않아도 달은 하늘 아래로, 또 이내 지평 아래로 떨어진다. 그렇게 엎어진 그릇이 땅 속으로 파고든다.

낮, 밤 하루가 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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