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서와 원서

페북에도 올려뒀다.


예전에 한창 하나의 이름을 통한 번역서와 원서의 동시 지시가 어떻게 가능한지 의문을 가졌던 기억이 있다. 첫째 계기는 텍스트성 발표였고, 다른 계기는 <언어철학연구> 세미나에서 다룬 흥미로운 사례(‘일리아드’는 고유명인가 집합술어인가?)에서였다.

가능한 답변이 서너 개 있다. 강도 순으로 정렬하자면 이렇다. 1) 명제적 동일성, 2) 명제 간 대응, 3) 명제 간 호환, 4) 공동체의 승인과 유사성. 가장 약한 것으로 5) 임시변통적 내지 6) 계보적 연관을 들 수도 있겠지만, 이것은 강력한 답변이 되기는 어려울 것 같다.

그런데 1~4도 그렇게 좋은 답을 내지는 못한다. 1이 갖는 문제는, 책은 자연언어로 쓰였다는 데에 있다. 따라서 원서의 내용이 내포하는 명제와 번역서의 내용이 내포하는 명제 사이에는 필연적 차이가 있다.

그렇다면 내용 상 대응이 된다고 하면 어떨까? 예컨대, 한 작품이 내포하는 바를 구조화하여 <p1, p2, …, pn>으로 순서화한 뒤에 번역서가 내포하는 바를 <qm+1, qm+2, …, qm+n>로 구조화하여 pn과 qm+k가 각각 대응될 때, 하나를 다른 하나의 번역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경우에는, 번역서가 번역 언어에서의 자연스러움을 위해 구조를 미세하게 변경하는 경우 성립하기는 어렵다.

2를 다시 약화하면 3이 된다. 이 때에는, 원서의 명제들을 느슨히 구조화한 뒤 그 구조들을 부분집합으로 갖는 P와, 번역서의 Q를 두고 P와 Q가 동일한 구조를 가질 경우 둘은 원서-번역서의 관계를 갖는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 해명은 번역 관계를 과하게 느슨하게 설정할 위험을 갖고 있다.

이쯤 되면 4가 나올 법하다. “그런 기준은 없고, 그냥 그걸 번역서로 하는 공동체적 기준과 책들 사이의 가족 유사성에 따라 두 책이 번역 관계를 갖는다!” 하지만 이 경우에는 존재론적 문제가 생긴다. 공동체의 기준에 관해서는, 우리는 어떤 이가 번역한 뒤 죽어서 땅에 묻힌 두 유물이, 현존하는 공동체의 승인 없이도 번역 관계를 갖고 있지만 단지 그것이 알려지지 않은 상태인 경우를 상상할 수 있다는 점이 반론이 된다. 가족 유사성에 관해서는, 우연히 같은 내용으로 배치된 서로 다른 두 글이 번역 관계에 있는 것은 아님을 통해 반박할 수 있다.

6은 4의 문제를 해소하게끔 하는 것 같다. 하나의 책과 다른 한 책이 계보적 연관을 가질 경우, 그리고 그와 동시에 공동체적 기준에 따라 번역이 승이된 경우 두 책은 번역 관계를 갖는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때에도 유물의 경우를 설명하기는 어렵다. 혹여 이에 대해 ‘이후에 두 작품이 번역 관계에 있다고 승인함에 따라 작품 간 관계가 설정된다’라고 할 수도 있겠으나, 이 해명은 존재론적 문제와 인식론적 문제를 혼동한 것일 뿐이다.

이상의 경우를 모두 배제하고 생각할 만한 것은 번역서와 원서를 모두 묶는 상위집합이 있고, 동시지시되는 경우는 그 집합을 외연으로 갖는 술어가 사용되는 경우라고 해명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게 적절한지 잘 모르겠다. 또 전에 교수는 이런 해명을 보고 ‘그거 맞다고 하려면 통사론부터 공부하세요’라고 하기도 했다(…)

결론) “번역서와 원서는 어떻게 ‘같은 책’으로 여겨지는가?”에 잘 대답하고 있는 자료를 찾습니다..

(덧-180724/ 이 문제에 대해 변광배(2012)는 해석학적 관점에서 가장 느슨한 번역 규정을 채택한다. 반면 박두운(1989)은 프랑스의 ‘등가성’개념을 변광배처럼 도입하면서도 구조적 등가성에 따른 번역서-피번역서 간 동일성을 주장한다. 박용삼(2000)은 독일 철학의 영향인지 가장 강한 번역 이론(상기한 1에 해당하는)을 코제리우로부터 가져오는데, 그렇게 유쾌한 결론을 주지는 않는다.)


10/17 지금 생각: 3이 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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