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리 제조자Truthmakers

진리 제조자는 진리 담지자(문장, 명제, 진술, ...)들을 참이게 만드는 그러한 존재자들이다.

Truthmakers(SEP)[링크]

진리 제조자란 무엇인가? 간단히 말해 진리 제조자는 진리 담지자(문장, 명제, 진술, ...)들을 참이게 만드는 그러한 존재자들이다. (다소 은유적인) 예시를 위해 다음 대화를 생각해 보자:

대화 1
아이: 엄마, '20세 미만은 주류 및 담배를 구매할 수 없습니다'라는데 그런 거야?
엄마: 스무 살부터 술담배를 살 수 있다고 법에 쓰여 있거든.

이 대화는 다음과 같은 고약한, 철학자들의 방식으로 다시 쓰일 수 있을 것이다:

대화 2
아이: 엄마, "20세 미만은 주류 및 담배를 구매할 권리가 없다"는 참이야?
엄마: 스무 살부터 술담배를 살 수 있다는 것이 법조문으로부터 참이 되거든.

이 재구성에서 아이는, [“20세 미만은 주류 및 담배를 구매할 권리가 없다”는 참이다]라는, 참에 관한 사실이 어떻게 성립하는지를 물었고, 엄마는 그 사실이 법조문에 무언가 적혀있다는 법적 내지 그 법조문을 만든 규약적 사실에 의해 성립한다고 답하고 있다.

그런데 이 때 엄마가 아이에게 준 답에서 우리는 “…으로부터 참이 된다”(be made true by ...) 내지, 달리 말해 “참이게 만든다”(to make true)와 같은 표현들을 사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표현은 이항 술어이다. 즉 무언가가 무언가를 참이게 만든다. 참이 되는 논항에는 참이 될 수 있는 존재자, 다시 말해 진리 담지자(truth-bearers)가 들어갈 것이다. 그렇다면 참이게 만드는 논항에 들어가는 것은 무엇인가?

바로 이 ‘참이게 만드는 논항에 들어가는 것’이 무엇이냐는 것이 곧 진리 제조자 개념 분석의 목표이다. 분명 우리는 진리 제조 문장에서 진리 제조자를 언급하고 있다. 가령 엄마의 답변에서는 법조문, 내지 보다 엄밀히 말해 법조문을 형성한 규약 따위가 진리 제조자로 언급된다. 그렇다면 보다 일반적인 견지에서 진리 제조자란 어떠한 것들인가? 그들은 어떤 성질을 갖는가? 이는 진리 제조자 개념이 낳는 철학적 문제들이다. (이 문제들에 관한 연구들로는, 위에 링크된 SEP 항목을 참조.)

한편 진리 제조자 개념은 그 정의 자체에서 철학적 문제를 이끌기도 한다. 널리 받아졌고, 또한 직관적인 진리 제조자에 대한 정의는 다음과 같은데: 진리 제조자는 그것으로 인해 무언가가 참이게 되는 그러한 것이다. 이 정의가 포함하는 비논리적 연결사 “…으로 인해”가 과연 어떠한 관계이냐는 것이 문제가 된다. 이는 일종의 의미론적 내지 형이상학적 결정 관계를 표상하고 있는 것으로 일단은 생각되는데, 과연 그러한 관계가 무엇이냐는 것이 보다 정확한 문제에 해당한다. “…으로 인해”에 관한 최근의 이론적 전개는 기반지음(Grounding)이라는 형이상학적 관계에 관한 논리를 구축함을 통해 ‘…으로 인해’ 관계를 해명할 형이상학적 개념을 정초해내자는 것이다. 물론 여기에 연루된 여러 (메타)형이상학적 문제들이 산재하며, 이는 다른 영역에서의 치열한 논쟁을 이끌고 있다(이에 관한 설명은 다른 글에서 이어가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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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확정자 그리고 두 종류의 현실주의

가브리엘 콘테사는 이 논문에서 양상 현실주의를 '순한맛'(softcore) 현실주의와 '매운맛'(hardcore) 현실주의로 구별한다. 전자는 스톨네이커로 대표되는 전통적 현실주의이고, 후자는 성향주의로 대표되는 새로운 현실주의이다. 저자는 후자에 대해 제기되는 문제에 대응하고 전자에 대해 새로운 문제를 제기하며 매운맛 현실주의를 옹호하고자 시도한다.

변화들: 다시 여는 말

블로그에 몇 가지 변화를 줬다. 1. 주소를 바꿨다(https://philtoday.kr). 보다 오랫동안 사용하고, 뉴스레터와 연계하기 위해 오래 전부터 계획하던 생각이다. 이에 맞추어 외부용 메일(wj@)과 뉴스레터용 메일(newsletter@) 역시 본격적으로 사용할 예정이다. 명함에 반영해야지. 2. 블로그 이름도 바꿨다. “백야”를 버리고 “오늘의 철학”으로 왔다. 사적인 공간의 이름이었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