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백야
담배를 끊다
담배를 그만 피워야겠다고 생각했다. 파이프에서는 반 보울 정도를 채울 숯덩어리가 떨어졌다. 떨어진 재 위로 연기가 한 가닥 피었다. 몸체의 열기가 가시고 난 뒤에는 평소와 같이 파이프를 닦아 냈다. 파이프를 닦는 과정은 꽤나 고루한 일이다. 모든 일은 큰 것에서 작은 것으로 향한다. 휴지를 접어 묻어 있는 잿가루와 고인 담배진을 쓱 닦아내고,
Wordpress에서 블로깅하던 시절의 포스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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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배를 그만 피워야겠다고 생각했다. 파이프에서는 반 보울 정도를 채울 숯덩어리가 떨어졌다. 떨어진 재 위로 연기가 한 가닥 피었다. 몸체의 열기가 가시고 난 뒤에는 평소와 같이 파이프를 닦아 냈다. 파이프를 닦는 과정은 꽤나 고루한 일이다. 모든 일은 큰 것에서 작은 것으로 향한다. 휴지를 접어 묻어 있는 잿가루와 고인 담배진을 쓱 닦아내고,
옛백야
1. 결국 시시콜콜한 잡담이긴 한데, 2. 그런 것을 자꾸 묻게 된다. 나는 무엇을 원하고 있는가. 나는 무엇을 할 수 있는 사람인가. 나는 무엇을 할 수 없는가. 나의 능력으로부터 나는 어떤 일을 할 수 있을까. 내가 멋있다고 여기는 일을 나는 할 수 있는가. 3. 어제 A와 이야기하다 깨달은 것이 나는 어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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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복이란 소린 싫지만 전복 먹고싶다
옛백야
퀴어신학은 해석학에서 시작한다. 성서비평을 하든 기존 조직신학 개념을 재해석하든 전복(=_=)하든 한 뒤에야 퀴어적인 조직신학이 가능하다. 오늘 모 강연에서의 강사는 꼭 퀴어신학이 성서비평-우선성을 갖고 있지는 않다고 주장했지만, 내가 보기엔 어떻든 퀴어신학은 텍스트비평에 우선성을 준다. 그런데 사실 당연하다. 교조적인 주장이 아닌 이상 예술 행위 내지 창조 행위가 없다면 조직신학적 방법은 불가능하다.
옛백야
철학은 필요 없는 지식만을 생산한다. 더 나아가 철학은 필요 없는 지식을 생산할 때에만 올바른 길을 걷는 것 같다. 역설적이게도 정말 그렇다. 어떤 사람이 제안한 철학적 입장이 과하게 과격하다면 그건 철학적 입장으로 적절하지 않아 보인다. 철학은 우리 삶에 대한 올바른 설명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철학적 입장이 우리 삶을 전혀 설명하지 못한다면
옛백야
철학이란 무엇인가. 통속적 철학은 철학인가. 나는 철학을 하고 있는가. “철학적인 이야기”는 철학인가. 무엇이 철학적인가. 경제학은 철학인가. 정치에 철학이 있는가. 인생철학은 철학인가. 철학이란 무엇인가. 나는 어떤 철학을 하고 있는가. 라는 식으로, 통속적 철학을 보는 중에 회의감에 빠지는 것 같다.
옛백야
종교철학을 처음 시작할 때 교수들은 이런 말로 나를 괴롭혔다: “종교철학에는 두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철학적 신학이고, 다른 하나는 종교철학입니다.” 처음 이 말을 들을 땐 대체 뭔 소리를 하는 것일까 하면서 짜증을 부렸는데, 이제야 좀 이해가 간다. 비평철학을 공부하자거나 언어철학을 공부하자고 하면 어떤 사람들은 이런 것을 떠올린다. 마르크스나 푸코의 틀을 갖고 비평하는
옛백야
더 많은 지면이 필요하다. 더 많은 글을 쓰고 싶다. 어딘가 정리하지 않으면 모두 사라질 것 같다는 두려움이 있다. 글쓰기 중독이다.
옛백야
1. 요즘 자꾸 되새기게 된다. 나는 왜 그것을 했는지, 왜 나는 이런지, 왜 다른 이들은 달랐는지 … 등. 2. 왜 나는 철학을 하는 것일까, 누가 철학을 이어가려 할까, 어떤 사람에게 철학은 재미있을까, … 이런 질문은 동료 모 씨에게서 발견한 것이었다. 3. 철학책이 재미있느냐, 이것 자체는 철학을 계속 할 이유가 되지는 않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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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평> 저자회의에서 파상과 토론 중에 어떤 말을 듣고 곰곰히 생각해 보았다. 나는 왜 텍스트의 절대성을 강조하는 (그리고 그 텍스트 해석자의 다양성을 인정하는) 비평철학을 지지하고 있는가? 나의 기독교 신학적 배경이 크게 작용한 것 같다. 비평철학적 관점에서뿐 아니라 대부분의 영역에서 기독교적 배경이 짙게 묻어 있다. 체계와 절차를 강조하는 것, 글쓰기의
옛백야
또다른 옹호 논증을 쓸지도 모르겠어서 ‘하나’라는 마커를 붙였다. 이것도 지평에 곧 공유할 예정이다. 이하는 <가능세계를 기술하는 술어는 현실 세계에서 그 술어가 표현하는 속성과 동일한 속성을 표현해야 한다>로부터 양상 실재론이 양상 문맥의 이해를 위해 반드시 전제되어야만 한다는 것에 대한 논증이다. 이에 대한 몇가지 반박 논증이 구성될 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