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oul
벤

옛백야

실재론

오랜만에 지평에 새로운 글을 올렸다: “추상적인 것에 관해 논쟁하기(링크)”. 내가 이 글을 통해 주장하려 했던 바는, 우리는 추상적 개념에 대해서도 그것이 가공의 것이 아닌 실재하는 것이라고 주장할 충분한 근거를 갖는다는 것이다. (또한 그것에 관해 잘 이야기할 수도 있다고 믿는 것에 문제가 없다고 나는 믿는다.) 이는 형이상학적 실재론을 지지한다. 한편

옛백야

2019 겨울 이야기

최근 백야에 방문이 뜸했다. 인스타그램을 통해 논문 후기를 공유하기 시작했던 탓이다. (위젯을 하나 들여야겠다.) 또한 이곳에 옮길 만한 아이디어가 없기도 했다. 방학 중에는 학술논문 투고거리를 하나는 만들려고 했는데, 딱히 떠오르는 것이 없다. 원래는 무신세계, 유신세계 또는 타종교세계를 상상할 때의 불가능사고에 관한 논문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는 한국에서 논의된 적이 없던

옛백야

오해들

종교적이지 않은 종교가 있을 수 있다. 신학적이지 않은 신학이 있을 수 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한가? ~적임, ~성 등은 어떤 것의 전형이 이러저러함을 내포할 뿐이기 때문이다. ‘종교적이지 않은 종교’는 자기모순이 아닌, 파격적 종교라는 의미이다. ‘신학적이지 않은 신학’ 역시 유사한 표현이라고 봄이 맞다. ‘형이상학적 테제’, ‘인식론적 논제’, ‘윤리학적 주장’ 등의 표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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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unterfactuals

오지은이 필연적으로 도화지의 작은 점일 경우를 가정하자. “네가 없었더라면 나는 도화지의 작은 점이었을 것이다”는, 어떤 의미에서, 공허하게 참이다. “너”가 있든 없든 그는 도화지의 작은 점이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왜 “네가 없었더라면 나는 도화지의 작은 점이었을 것이다”는 인지적으로 중대한 어떤 의미를 갖는 것처럼 보이는 것일까? 아마도 우리는 이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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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적 귀납법과 형이상학의 가설-연역적 승인

내가 ‘철학적 귀납법’이라고 말할 때, 의도하는 바는 이런 것이다. 여러가지 철학적 입장에 비추어 볼 때, 상당수가 c를 귀결로 갖는다. 따라서 c를 승인하는 것이 매우 설득력있다. 우리는 어떤 존재론을 가질 것이냐와 별개로 c를 승인할 좋은 이유를 갖는다. 한편 과학적 귀납법과 유사한 종류의 다른 철학적 추론이 있다. ‘형이상학의 가설-연역적 승인’ 혹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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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와 존재자

H가 이렇게 말했다. 존재는 존재자가 아니다, 또는 서구 존재론은 존재자들만을 탐구했다. 존재는 초월이고, 존재는 드러남이다. H의 어떤 추종자들은 이것을 아주 심오한 철학적 주장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나는 이것이 그다지 심오한 말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 진술이 담는 주장 자체는, 존재의 개념이 외연으로 환원될 수 없다는 것, 존재는 존재자로 인한 것이 아니라는 것

옛백야

비합리성의 옹호자들

어떤 사람들이 말한다. 서구 합리성의 역사는 이러저러한 역사적 악행을 정당화시켰다. 따라서 합리성의 거부가 요구된다. 비합리성을 통한 정치와 예술만이 구원한다. 합리적 기획에는 선한 것이 없다. 그들의 결론을 어떻게 맞다고 할 수 있는가? 근거를 통한 옹호 가능성을 보아야만 여부를 알 수 있다. 요컨대, 그들에겐 역사적 검토가 그 근거이다. 또한 당대의 사상으로부터 합리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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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킨 게임

D철학자들은 A철학자들이 신중하지도 용기가 있지도 않다고 생각한다. 마음이 몸의 일부라는 것은 편견이다. 나는 두뇌가 아니다. 몸의 독창성을 인정하라. 텍스트에 내용이란 없다. 오로지 그것은 기호이다. 독자의 주체성이 중요하다. 그러나 어떤 A철학자들은 D철학자들의 그러한 지적을 넘어선다. 차라리 마음 자체가 이미 물리계 안에 있다. 또는 물리계의 어떤 사건에 관한 이야기가 마음에 관한 이야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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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보다 순조롭다

무엇이 순조롭냐고 하는 것인즉, 학위논문으로의 길이 순조롭다. 생각보다 나는 길을 잘 걷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까지 온 것과 연속적으로 이후의 길을 걷는다면, 아마 내 연구는 이런 방향이 될 것이다. 다른 종교가 대화 상대가 되려면 우리는 그 종교가 “참이었을지도 모를” 어떤 체계였으리라고 간주해야 한다. 그러나 그 체계는 그 자체로 필연적 참임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