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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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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 체계의 여러 형태들

각각의 진리 체계는, 어떤 것에 관한 진술들로 이루어진다. 예컨대 페아노 공리계에 기초한 산술 체계는 수에 관한 진술들로 이루어진다. 국어 문법에 기초한 의미 체계는 명제들에 관한 진술들로(이 표현이 조금 불명확하다) 이루어진다. 칼뱅주의에 기초한 신앙 체계는 종교적 대상에 관한 진술들로 이루어진다. 등등. 어떤 체계의 언급 대상들, 즉 한 체계의 치역에 해당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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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존재론

나는 나를 소개할 때 “메타존재론”의 주제에 관심이 많다고 말한다. 메타존재론이란 무엇인가? 존재론에 있어 문제되는 사안 일반을, 그 존재론 밖에서 분석하는 작업이다. 예컨대, Philpaper.org는 메타존재론의 하위분류로 다음과 같은 것을 들고 있다: 존재론적 개입; 존재론적 규약주의 및 상대주의; 존재론적 불일치; 존재론적 허구주의; 존재론적 다원주의; 존재론적 실재론; 양화와 존재론; 형이상학에서의 방법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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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상 종속적 철학은 가능한가?

어떠한 사상에 따르는 철학, 예컨대 여성주의적 철학이나 기독교 신학적 철학, 맑스주의적 철학은 가능한가? 그것들 각각은 때로 줄여서, 여성철학/기독교철학/맑스철학으로 불리기도 한다. 여하간 그러한 것은 가능한가? 철학이 갖는 학문적 지위는 메타학문으로서의 그것이다. 여러 눈들 사이에서 다른 눈 모두를 보는 감시자의 역할이다. 따라서 철학은 그 자체로, 모든 학문들의 논의 영역domain을 스스로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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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강림 혹은 부활

* 성령강림주일을 맞는다. 동시에 이한열의 죽음을 맞는다. 동시에 동료 친지의 부고를 맞는다. * 성령의 강림과 성도의 죽음은 어떠한 관계도 없어보인다. 그러나 실상 그 둘의 관계는 어떤 것보다 긴밀하다. 성령 강림 사건은 예수의 죽음 후에야 찾아왔다. 단지 시간 상으로만 이후인 것이 아니다. 예수의 죽음을 애도하는 바로 그 때 사건이 일어난다. * 성령 강림의 사건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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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의식과 잘못

* 죄의식과 잘못 사이에는 종종 괴리가 있다. 잘못은 어떤 사건의 유형인 반면 죄의식은 어떠한 사실에 있어 그 부정적 책임을 스스로에게 지우는 의식적 경향이기 때문이다. 후자의 경향은 심지어 실현된 적 없던 사태가 어떤 시점에 일어났다고 생각하는 경우, 그 대상을 갖지 않으면서도 가능한 것이다. * 잘못을 의식하는 것과 허위의 죄의식을 강요받는 것은 어떤 차이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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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의 보수성

* 통념보다 철학은 보수적인 작업을 하는 학문이다. 가장 정치적 실천을 중시하는듯 보이는 프랑스 현대 철학도 그렇다. 이른바 “생성의 철학”과 “진리의 철학”이 구분될 수 있다 해도, 이른바 “윤리적 전회”라는 것이 발생했다 해도, 철학적 작업은 어느 정도의 보수성에서 더 나아가지 않는다. 여기에서 언급되는 보수성은, 그것이 피분석항의 변혁에 관여하지 않기로 요구된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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뿌리들

* 크래머의 “해석학 비판: 해석철학과 실재론”을 읽는다. 독일 철학과 프랑스 철학을 주로 잇대는 우리의 경향에는 의아하게도, 그는 콰인과 로티, 데이빗슨과 퍼트남, 그리고 굿맨을 먼저 언급한다. 해석이라는 측면에서 적어도 앵글로색슨과 게르만, 로망스가 한 데 얽힌다. * 해석이라는 주제, 특히 해석의 다원성으로부터 나오는 존재/인식적 상대론에 대한 문제는 세 이질적 철학에서 공통적이다. 그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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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신학적 옹호

중세의 신학자들은 자연 세계를 통해 하나님의 본성이 고찰될 수 있었다고 믿었다. 한편으로 자연신학은 비판될 수 있다. 왜 그러한가? 자연세계 역시 하나님의 은총이 경유되지 않으면 하나의 계시로 발견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이 비판은 아주 근대적인 정신에서 나올 뿐이다. 이 비판은 세속에 대한 신성의 존재론적 우위를 주장할 수 없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