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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백야

무엇-어떻게-왜

대학원 신입생 강독회를 위해 강독 도서인 지도교수의 대표작을 읽는다. 서문의 내용은 그가 여느 수업에서도 처음부터 깔고 들어가는 이야기와 동일하다. 분석철학을 하겠다는 입장에서는 머쓱한 소리일 수 있지만, 그의 철학적 전제는 대학에 들어왔을 당시에도, 또한 지금도 아주 그럴듯한 틀을 제공한다. 그의 전제는 철학적 질문의 구획이 무엇-어떻게-왜, 그리고 그 왜에 대해 병렬적인 질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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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심 있게 쓰기의 어려움

자꾸 어렵다. 뭐가 어려운진 몰라도 확실히 뭔가 어렵다 ㅇㅅㅇ.. 일단 오늘의 어려움은 양심 있게 쓰고 말하는 법이다. 애기때부터 대학 와서까지 줄기차게 들은 ‘글쓰기 교양’의 많은 부분은 <나를 드러내지 말 것>이었다. ‘나는~생각한다’ 꼴의 글을 쓴다면 설득력이 떨어진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말해야 하나? 앞뒤를 자르고 “~”만 써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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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료함 외의 어려움

명료함이 아니니까 ‘일상’ 카테고리에. 1. 공동체 S에서 일을 시작한다. 성탄절, 점심을 먹고 사람들과 인사 겸 카페에 갔다. 어쩌다보니 인스타를 발각당한다. 철학을 좋아한다는 것을 알고 B가 묻는다. “어느 철학자를 좋아하세요?” “아.. 러셀이라는 사람을 좋아합니다.” 갑분싸. 2. 성탄 저녁에 갑작스레 한 파티에 참여한다. 랜덤으로 부여된 주제어를 갖고 시를 쓴 뒤 나누어 갖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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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묘사

나는 허구를 모사할 때 인물의 말이나 행동은 가장 건조하게 그려야 한다고 생각한다. 따옴표나 다양한 문장부호로 이루어진 표현은 그 인물이 어떤 성격을 갖고 있는지를 너무 적나라하게 드러내기 때문이다. 필요한 경우가 아니라면 인물에 대한 넓은 해석이 가능하도록 건조한 그림을 그릴 필요가 있다. 시대의 탓에 성서에는 문장부호가 없다. 그래서 항상 다양하게 해석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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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러셀의 찻잔

차 끓이다가 문득 생각나서 쓰는 중이다. K는 칸트의 줄임말은 아니다. 딱히 나의 모습을 투영한 것도 아니다. 내 이야기를 써 볼까 하다 식상해서 그만 두었다. 나는 홍차를 자주 마시긴 하지만 우연히 그런 것이고, 실제로는 백차를 좋아한다. 비싸서 못 마신다. 학교 도서관 서가 700번대에 만화가 많다는 것은 도서관 근로장학생을 하며 알게 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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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신학과 교회교의학

문화신학을 해야 하는가, 교회교의학을 해야 하는가? 두 신학적 위치는 일견 상반된 듯 보인다. 그러나 그것이 정말로 모순되는 두 후보인지는 재고해 보아야 할 문제이다. 교회신학으로서 신학이 교회 공동체의 언어를 본다면, 문화신학으로서의 신학은 교회가 자기 언어로 지시하는 초월성 자체와 세계의 관계를 보기 때문이다. 전자는 교회와 세계의 대화에 기여하지 못하는 반면, 교회 언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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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사된 세계로서 현실 세계

<현대윤리학>(강철) 기말 발표를 위해 무언가를 준비하고 있다. 다음과 같은 입장이 어디에 속하는지 잘 모르겠다. 말하자면 포이어바흐스러운 해석인데, 메이크빌리브 이론 등과는 좀 다르다. 일단은 블로그에 남겨 두어야지.. 나의 아이디어는 이렇게 시작한다. 우리가 현실 세계로 생각하는, 특정한 법칙이 작용하는 공간은 우리의 경험 세계와는 구분되어야만 한다. 경험 세계에서는 경험적 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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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적 무의미

1. 예컨대 무의미한 것은 이런 것을 두고 벌어지는 논쟁이다. “하느님은 한 분이신가?” “예수께서 부활하였는가?” “육신에 매인 자가 구원받아 있는가?” 2. 그 이유는, 종교의 언어는 두 겹 층위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보헨스키는 이를 <종교 논리학>으로 정식화하고자 했다.) 표면적으로 종교의 언어는 세계의 어떤 대상에게도 관여하지 않는다. 그 언어가 담지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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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능성과 상상 가능성

상상 가능한 것은 모두 가능한가. 여기에는 반례가 있다. 우리는 골드바하의 추측이 참인 세계와 그렇지 않은 세계를 각각 상상할 수 있으니 그 세계는 필연적 참인 수학적 참이 서로 다르므로 둘 중 하나는 불가능하다. 따라서 지식과 사실의 간극이 존재하는 한 상상 가능성은 가능성을 보장하지 않는다. 가능한 것은 모두 상상 가능한가. 알 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