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atest

옛백야

사건이 아닌 사태를 표상함

우리가 표상하는 것이 하나의 사건이 될 수 없다. 모든 사건은 그것의 고유한 시간과 공간 안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사건을 우리가 재현한다는 것은,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그 시기로 돌아가거나, 특정한 매체를 통해 바로 그 고유성을 반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재현은 불가능하다. 적어도 물리적으로 그렇다. (나는 또한 형이상학적으로도 그것이 불가능하다고

옛백야

집과 직장의 중첩된 어딘가; 그 중첩을 떠나며

오늘도 자유교양으로부터 “굴림” 당해버렸다. 50주년 기념 문집에 실릴 기사를 내라고 해서, 끝까지 미루다 후다닥 만들어 버렸다. 퇴고따윈 하지 않고 제출해 버린다. 그렇더라도 진심이 아닌 것은 아니다. 1. 꼬박 네 해를 채웠습니다. 대학 생활과 동시에 시작한 자유교양에서의 공동체 생활이었고, 이제 졸업을 해 3월이 되었니 딱 그만큼이 지났습니다. 그 사이에 많은 것이

옛백야

개별자 종속적 보편자, 또는 거친 의미에서의 트롭

몇 년 전 어느 수업의 기말 페이퍼에서 나는 다음과 같이 논증했다. 거칠고 서툴지만, 여전히 나의 관심이 같은 곳에 있음을 보여준다. 서로 다른 주어에 대해 같은 술어는 실제로 같은 현상을 지칭하는가? 즉 “a가 생각한다”와 “b가 생각한다”는 a와 b에게 실제로 같은 일이 일어나고 있음을 주장하는가? “x이(가) ~의 색을 본다”

옛백야

어떤 회의주의

어떤 사건이 신성 체험을 야기한다. 그 사건을 두고 계시라고 부른다. (또는, 어떤 존재자가 신성을 예화하는 사건이 계시이며 그것이 신성 체험을 야기한다.) 심적 표상은 오로지 신성 체험만을 내용으로 갖는다. 그러한 체험은 신성을 담지하거나 예화하지 않는다. 따라서 우리는 신성과 면식 관계를 형성할 수 없다. (여기에는, 합리적 구성을 통해 신성을 개념화할 수 없다는

옛백야

철학적 사적 언어

어떤 철학자의 말을 이해하기 위해 그가 사용하는 모든 단어를 그의 버전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통념이 있다. 예컨대 철학자 D가 말한 “개념”이라는 표현을 이해하기 위해 그의 (이른바) “철학”을 이해해야 한다. 이런 믿음이 타당한가? 그의 주장이 맞다면 D에 대한 바른 해석은 모두 불가능하다. 어떤 개념에 있어서도, 그 개념은 사적 의미망 속에서만

옛백야

자연종과 인공종

자연종과 인공종이 자연적으로 나뉜다는 믿음에 대한 불만이 있다. 그 경우 발생하는 형이상학적 부담이 크기 때문이다. 자연종을 포함하는 “자연적인 것의 모임”이 있다고 하자. 그렇다면 이 때 자연적으로 실재하는 것은 단지 자연종인 그것들 뿐 아니라 자연적인 것의 모임이 되는 “자연종 집합”까지이다. 그런데 집합의 개념이 자연적이라고 본다면 너무나 많은 추상적 존재자를

옛백야

“형식적 정의”

비평은, 철학은, 신학은, 대상 담론에 참여할 수 있는가? 그렇지 못하다는 것이 타당하다. 두 이유에서 그렇다. 첫째, 비평 일반은 어떤 대상들의 존재 양상을 설명하는 행위이다. 그런데 대상이 되는 담론에 그것이 참여한다면, 그것은 스스로에 관한 언술을 내포한다. 이는 순환적이다. 한편 이는 명시적인 순환이므로, 나쁜 순환이다. 둘째, 비평 일반은 어떤 대상의 유적인 본질을